[아가씨 vs 건달]
<투 윅스 노티스>의 루시 켈슨 또는 샌드라 불럭이 밥맛없는 이유
2003-02-27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그 여자, 난리났네

나는 비열한 관객이다. 비디오 가게의 로맨틱코미디 코너에서 헤매는 친구에게 “너는 만날 싸구려 로맨틱코미디나 보냐”고 야유하면서 나 자신은 미개봉 작품까지 다 뒤져서 보는 로맨틱코미디팬이다. 평가도 아주 너그러워 지난주 <씨네21>에서 준열하게 꾸짖은 <동갑내기 과외하기>도 나로서는 흡족했다.

그러나 <투 윅스 노티스>를 보면서는 짜증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원인제공자는 루시 켈슨 또는 이 잘난 여자를 연기한 샌드라 불럭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이 두 여성 또는 한 여성이 왜 너그러운 나의 심성을 벌집처럼 쑤셔놓았는지 항목별로 그 이유를 밝히겠다.

1. 루시 켈슨은 거대한 파쇄봉에 목숨 걸고 매달려 오래된 건물이 파괴되는 걸 막는 열혈 환경주의자다. 그런 환경주의자가 밥은 만날 코팅된 종이로 만든 일회용기에 담겨 비닐봉지에 둘둘 싸여오는 음식을 시켜먹는다. 햄버거 하나를 만들기 위해 해마다 1m2의 밀림이 사라진다는데- 미래의 고기들이 먹는 풀과 포장지 포함- 환경주의자라는 인간이 일회용 포장용지에 담긴, 그것도 동물성 기름투성이인 중국 음식을, 그것도 그렇게나 많이 먹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2. 루시 켈슨은 고분고분한 여자가 아니다.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어릴 때 이미 백악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을 정도로 그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말은 하는 여자다. 그런데 왜 조지 웨이드에게만 ‘노’라고 말 못하고 시녀 노릇을 하는가. 안 가면 되지 왜 조지의 옷쇼핑까지 쫓아다니며 내가 네 비서냐고 징징대냔 말이다. 밤에 오는 전화 안 받으면 되지 꼬박꼬박 받아서 상대해주며 왜 밤마다 잡스런 일로 전화하냐고 투덜거리냔 말이다.

3. 조지와 함께 자신이 어릴 때 살던 동네에 간 루시는 “저 노인들이 자식들 주차장소 지키려고 저렇게 하루종일 길가에 (의자 내놓고) 앉아 있다”는 말을 아주 정답게 한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인 것처럼. 사유지도 아닌 공간에 제 자식 하나 편하게 주차시키려고 하루종일 다른 사람들의 주차를 막는 이 악랄한 가족이기주의를 하해 같은 사랑이라고 생각하다니 당신, 진보적 인간 맞냐고요. 그리고 달리 보면 이건 순전히 노인학대 찬미다. 얼마나 할 일도 갈 곳도 없으면 노인들이 하루종일 길바닥에서 주차공간이나 찜하고 있겠는가. 노인복지 아랑곳하지 않는 루시 켈슨 각성하라! 각성하라!

4. 루시는 자기네 동네의 마을회관을 보존한다는 조건 아래 재건축 부동산 재벌 조지 웨이드와 손잡는다. 조지의 온갖 시다바리 노릇을 다하지만 어쨌거나 루시는 웨이드 회사의 재건축 사업을 위해 법률적 지원을 하는 변호사다. 그럼, 자기네 동네 마을회관만 중요하고 다른 동네 마을회관이나 다른 오래된 건물들은 다 박살나도 상관없다는 거 아닌가. 가족이기주의로 부족해 지역이기주의까지 철철 넘쳐 흐르는 루시 너 정말 골고루 하는구나.

5. 인면수심, 나는 루시 켈슨을 연기한 샌드라 불럭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루시 켈슨, 하버드 나왔다. 하버드 나왔는데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무료변호한다. 자기만 정치적으로 올바른가. 엄마는 법대 교수, 아버지는 변호사, 직업 훌륭한데다 딸래미에게 취직 대신 무료변호를 권할 정도로 올곧으시다. 남자친구? 그린피스호에 탄 환경운동가다. 뿐인가? 현대 여성들의 약한 고리, 다이어트를 비웃듯 무지하게 많이 먹는다. 심지어 코까지 너무나 씩씩하게 고신다. 드르렁 드르렁. 루시 켈슨은 지성, 미모, 배경, 터프, 소탈, 깜찍,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과 약간의 푼수기까지 갖춘 현대의 공주를 완벽하게 구현한다. 아무리 자기가 대장(샌드라는 제작자도 겸했다)이라고 해도 이따위 짬뽕캐릭터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 제 정신이 털끝만큼만 박혀 있다면 과연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6. 뭐니뭐니해도 샌드라 불럭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파렴치한이다. 자기가 휴 그랜트를 좋아하면 그냥 연애를 걸지 왜 둘이 나오는 영화까지 만드는 수선을 피우냐고. 흥! 자신이 없었겠지. 그러니까 자신은 말도 안 되는 온갖 매력을 다 쑤셔넣은 캐릭터로 등장하고 상대방을 환상의 남성캐릭터(백만장자 미남에 얼빵하기까지!)에 앉혔겠지. 그래서 제작기간으로 시간을 끌며 온갖 전략과 전술을 이용해 결국 우격다짐 염문을 만들었겠지. 뽀뽀신도 시나리오 작가를 협박해서 억지로 넣었을 게 틀림없어

* 이상은 로맨틱코미디에서 자신의 우상을 독차지한 걸로도 모자라 염문까지 뿌린 여배우에게 식칼과 함께 동봉해 보내고 싶어하는 한 소녀의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영화읽기였음.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