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국화꽃 향기>에서 지고지순한 사랑 펼친 박해일
2003-02-28
글 : 김영희 (한겨레 기자)

해맑던 그 소년, 사랑을 아는 남자되어

10대 어느 날의 사진처럼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전반부, 박해일의 하얀 얼굴은 인상에 길게 남았다. <질투는 나의 힘>(4월 개봉예정)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았을 때 그는 열정은 있지만 불안하고,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20대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최근 촬영을 마친 <살인의 추억>의 강렬한 인상의 범죄용의자역을 끝낸 그는, 첫 개봉 주연작 <국화꽃 향기>로 비로소 관객들과 본격적인 대면을 갖는다.

“<한겨레>가 저와 인연이 있어요”라는 말부터 건네왔다. 지난해 부산에서 볼 때만 해도 몹시 말을 아끼던 수줍은 모습이더니 많이 수더분해졌나 보다, 했는데 사연이 있다. 94년 수능시험 소집일 친구의 오토바이를 빌려타고 달리다 큰 교통사고를 당해, 양호실에서 수능시험을 치른 날 <한겨레>기자가 인터뷰를 해간 것이 “생전 처음 신문에 났던 기억”이란다. 그 사고로 군대를 면제받으며, 그는 또래보다 일찍 사회에 부딪쳤다. 그냥 재털이 앞에 놓고 기타 두드리는 그런 분위기가 좋아 음악동아리도 해봤지만 “쟁쟁한 선배들에 밀려 청소만 하다가”, 아예 본격적으로 해보겠다고 대학생활도 때려치우고 들어선 길이었다. 뷔페 웨이터, 비디오방, 전단지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흔히 남들은 군대 갔다와 패기 있게 자기인생의 스케줄을 쭉쭉 밀어붙인다는데 전 남는 시간 동안 많이 생각하고 많이 헤맸어요.” 그래도 뭘 할까, 뭘 좋아하냐 조금씩 사회의 한 조각으로 물려들어가며 생각하던 그 시기가 “지금의 내 얼굴”을 만든 셈이다.

열정과 불안이 들끓어 보이는 얼굴의 그가 <국화꽃 향기>의 지고 지순한 사랑을 간직한 인하를 맡은 건 의외였다. 연극 <청춘예찬>의 그를 ‘발견’했던 건 임순례, 박찬옥, 봉준호 감독. 차례로 이들의 영화에 참여한 그에게 <국화꽃 향기>는 “연극 선배들도 없고, 본격적인 상업영화”였다. “유연해져야 할 것 같았어요. 언젠가 대중적인 멜로장르를 해봐야 할 것 같았고. 그 안에서 박해일, 니가 어떤 모습일까 그게 궁금했어요.” 그는 “감정몰입이 쉽지 않았어요. 찍으면서도 내가 결혼하고 애아빠가 되는 모습까지 연기할 수 있을까 불안했고”라며 솔직히 털어놓았다. 요플레 수백 개와 꽃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이 구식세대 같아보였지만 “주변적 삶을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전 중간세대의 정서인 것 같아요. 이 세상 수십억 커플 가운데 그런 사랑도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원작의 지적이고 쾌활하고 이상적으로 완벽했던 주인공은 박해일이라는 배우 안에서 어리숙하고 평범해보이는, 현실성 있는 인물로 바뀌었다.

여리고 사려깊어 보인다고 하는데 “사실은 안 그렇다”면서도 “사교적이기도 하고 혼자 잘 놀기도 해요. 쥐죽은 듯이 있는 것도 노는 거니까. 음악은 항상 ‘온’해놓고…”라고 말할 땐 이 조용한 청년의 마음 한구석을 알 것 같았다. 약간은 뒤틀린 소시민의 이야기를 좋아하며 “아직까진 여러 가지 해봐야 할 시기지만, 일상에 가깝고 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꺼낼 수 있는 영화를 따르고 싶다”고도 말했다. 정지우 감독의 <두 사람이다> 촬영을 앞두고 있는 박해일은, 2003년 가장 바쁜 신인배우 중 하나가 이미 되어버렸다. 그의 앞길을 계속 지켜보고 싶은 것은, 아직 20대지만 이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넓고 맑은 눈 때문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