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인터뷰] 매춘여성 국회의원 ‘예지원’
2003-03-11
글 : 김영희 (한겨레 기자)

처음엔 이런 감정을 느낄 줄 몰랐다. 단지 에스메랄다처럼 “삶을 돌아보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윤락녀 캐릭터를, 무엇보다 “여성이 이끌고 나가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 “깜찍하고 발칙한” 발상의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출연하게 됐다. 배우 예지원, 아니 기호 4번 고은비 후보의 ‘국회의원 선거 출마기’다.

헌법 제1조를 아시나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처음엔 대사로 줄줄 외웠죠. 하지만 영화속 합동유세때 실제 장애인, 노숙자분들 등 1500여명의 보조출연자들이 추운 날씨 아랑곳 않고 고은비를 환호하는 데 정말 감동받았어요. 그리고 생각했어요. 왜 이들은 1조의 권리를 누리지 못할까. 고은비가 그랬듯이.”

선거를 치르며 고은비가 점차 못가진 자, 소외된 자의 상징이 되어간 만큼 예씨는 소중한 감정을 배우게 된 듯 했다. 영화의 대부분 촬영은 전주에 있는 실제 윤락가에서 촬영됐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우릴 미워하면 어떡하나. 근데 그곳에 있는 분들 정말 평범해요. 단지 밤이 되면 진한 화장과 야한 옷을 입는다는 것 뿐이에요. 방 빌려줄테니 와서 쉬라는 언니, 옷 빌려주겠다는 언니, 와서 밥먹으라고 부엌 빌려준 주인… 모두 못 잊을 분들이에요.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실제 고은비의 감정을 못 느꼈을 거에요.”

일간지의 사회면을 장식한 ‘국회 월장’ 촬영까지 마치고 영화개봉을 앞둔 지금, 예씨는 ‘국회의원 당선소감’을 당당히 밝혔다. “말단 샐러리맨이 사장될 수 있고 소외받은 소시민이 능력 발휘하는 세상, 그것이 고은비가, <대한민국…>이 바래는 사회죠. 노무현 대통령도 어떤 의미에선 고은비인 거에요. 이전같으면 이 영화가 ‘시원하다’는 소리만 들었겠지만 이젠 좀더 실현이 가능해진 것 아닌가요”

전주 매춘가에서 촬영

‘어색한 거 깨게… 뽀뽀 할까요’ 당돌하게 말하던 <생활의 발견>의 쓸쓸한 얼굴의 명숙처럼, 바람처럼 길처럼 자유로워보이는 예씨는 한 구석 애잔함을 간직한 배우다. 으로 데뷔해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촬영중인 <귀여워> 등 어느 하나 ‘교과서에는 없는’ 캐릭터를 맡아온 이 배우는 “관객들에게 팬터지를 주는 역이 아니라, 관객들과 비슷해 그들이 위로해주고 싶은 역들이죠. 남들은 그만 망가지라지만 전 너무 즐거워요. 속이 후련해요”라 말했다. 텔레비전 드라마 <꼭지><줄리엣의 남자> 정도를 제외하곤 “자주적이고 개척하는 여자”를 해온 셈이다. 촬영중 남진씨의 팬들이 서울에서 버스 하나를 대절해 김밥싸고 내려왔던 이야기를 하며 “우리가 그 나이에도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겠어요” 말하던 예지원 ‘당선자’에게 궁극적인 포부를 물었다. “가만 있어도 향기가 나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어떤 영화?

야당의 국회의원이 여당쪽에서 보낸 듯한 윤락녀와 정사를 벌이다 복상사(물론 대외발표용은 ‘과로사’다)하며 여야 동수가 된 가운데 수락시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열린다. 여당, 야당, ‘단군할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를 외치는 무소속 후보에 기호 4로 이 도시 윤락가에서 일하는 고은비가 출마한다. 끔찍한 성폭행을 당한 동료 사건이 윤락녀란 이유로 수사조차 못받자 분개해, 사투리 ‘징하게’쓰는 욕쟁이 괴짜신부 베드로, 아나운서를 꿈꾸는 동료 세영 등의 도움으로 나섰다.

<대한민국 헌법제1조>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시원하리 만큼 명확하다. 여기서 악은 국민들의 속내엔 관심없는 정치인들의 우스꽝스런 모습 그 자체다. 반대편엔 윤락녀를 비롯해 장애인, 노숙자 등이 있다. 정치적으론 너무나 올바른 의식이 장점이라면, 풍자라 하기엔 너무 직설적이고 단면적인 묘사방식은 단점이다. ‘사실적’이라고 넘어가기엔 전반부의 과도한 섹스코드는 불쾌감을 줄 정도. 그럼에도 이 거친 대중영화는 ‘내질러 보는’ 에너지를 품고 있다. 감정과 의식과잉 속에서도, 정많고 서로를 보다듬는 소수자들의 따뜻한 마음만은 진정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사가 있는 출연자만 75명인 영화 속에서 임성민, 최은주 등이 연기한 윤락녀 동료, 기호 3번 후보역의 장대성, 386 세대를 풍자한 듯한 캐릭터 방송기자역의 이문식까지 많은 배역에 골고루 눈길이 가는 것도 미덕. 특히 베드로역의 남진은 안정감있게 영화를 뒷받침해준다. 1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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