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람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예지원의 모든 얼굴 근육은 자기 눈동자의 정중앙을 향해 정렬한다. 어떤 절절한 감정이 담긴 듯한데, 그게 뭔지 쉽게 안 읽힌다. 자기 감정에 몰입하는 정도가 상대방과의 교감을 방해할 정도로 깊은 걸까. 열정적이면서 동시에 모호한 구석이 예지원에게는 있다. 그래서 반듯한 동양적 미인임에도 어딘가 과하거나 부족한 캐릭터, 이따금 푼수기나 백치미를 동반하는 역할이 그녀에겐 소화가 된다. 예지원은 인터뷰 장소에 자기 집 개를 데리고 왔다. 12살짜리 ‘뽀삐’로, 함께 살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돌볼 사람이 없어 촬영현장에도 데리고 나간다고 했다. 조그맣고 순하게 생긴 뽀삐의 사람보는 눈이 뭔가를 바라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호했다. “뽀삐는 눈으로 말을 해요. 질투심, 호기심, 애절함, 걱정 같은 걸 다 표현해요. 연기자의 눈을 가졌어요.” 선수끼리 통하는 걸까.
예지원의 열정과 모호함을 동시에 잡아낸 건 <생활의 발견>이었다. “대본을 연기 당일날 아침에 받았잖아요. 그래도 부담이 안 된 게 명숙에게서 나하고 닮은 면이 많이 나오는 거예요. 무척 재밌었어요. 오늘은 또 어떤 게 나올까 기대도 하게 되고.” 만난 첫날에 사랑한다고 해놓고, 다음날 다른 남자와 자며 태연하게 전화하는 푼수 같고 황당한 명숙이 자기를 닮았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하긴, 명숙은 순간적일지언정 자기감정에 몰입해 무모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 김상경에게 전염시키지 않았던가. 삶의 우연성과 모호함을 자기 안에 고스란히 넣고 살면서 영화의 주제를 떠받드는 이 인물이 생기를 얻은 건, 예지원의 캐릭터에 대한 확신 없이는 힘들었을 터. 그뒤에도 많은 여배우들이 분명하고 반듯한 역할을 찾아 이미지를 관리할 때, 예지원은 거꾸로 <2424>의 어리숙한 팜므 파탈을 거쳐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윤락녀를 연기했다.
망가짐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에겐 없다. 반대로 필요하게 망가지는 걸 ‘미래지향적’이라고 말한다. “망가지는 것만 따지면 못하겠지만, 그 캐릭터들이 시대에 맞는 것 같아요. 우리 주위에 그런 모습들 많잖아요. 다만 드라마, 영화에 없을 뿐이지. 하지만 최근엔 많아지고 있고, 외국영화에는 이미 많이 나오잖아요. 지금하는 역할들이 다 미래지향적이라고 봐요. 그리고 관객이 좋아해요. <줄리엣의 남자> 때 우아떠는 역할을 했다가 엄청 욕을 먹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너무 많은 분들로부터 사랑을 받기 시작했어요. 전에는 길에서 저를 알아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하거나 위아래로 힐끔힐끔 훑어봤어요. 요즘엔 여기저기서 환호와 격려가 답지해요. 희열과 보람을 느끼죠.” 그러고보면 <생활의 발견>으로 가기 전에 준비단계를 거쳤다. 여성 성기의 명칭을 자신있게 외치자고 선동하는 1인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광기어린 축제판 <록키호러 쇼> 등 두편의 연극에서 “관객과 솔직하게 대화할 때” 오는 연기의 희열을 맛본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거칠고 과장된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무모할 만큼 용감하게 정치적으로 앞서간다. 윤락녀가 자기 신분을 드러낸 채 국회의원에 당선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보통 사람들이 가질 법한 거부감을 의식한 순화장치가 거의 없다. “망설이지 않았냐구요? 어차피 영화고 가상현실이고. 이탈리아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다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하죠. 그래서 더 재밌지 않나요. 영화가 새로운 제시를 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현실을 돌아보자, 그런 건 있다고 봐요.” 이 영화에서 그녀가 맡은 고은비는 거침없고 씩씩하긴 하지만 모호한 구석은 없다. 그 때문일까. 이 영화에 대한 예지원의 말은 약간 겉도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 촬영 중인 김수현 감독의 <귀여워>를 말할 땐 달랐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한 가족의 3대가 동시에 사랑하는 희한한 ‘4각관계’의 중심인물이 그녀다. 단순치 않은 캐릭터일 것 같은데, 예지원은 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자신은 지극히 정상인 여자죠. 눈치 안 보고, 거침없고, 하고 싶은 걸 다이렉트로 하는데 주변 남자들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고민하고 점수따려고 나름대로 작전을 짜요. 그러다 여자가 쌀쌀맞게 나오면 꼼짝 못하고. 가장 행복한 여자죠. 감독님이 애드리브를 많이 살리거든요. 현장이 너무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