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흥행 몇위냐고?미친 소리! <러브 인 맨하탄>의 랠프 파인즈
2003-03-19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랠프 파인즈(41)는 인상이 강렬한 스타일이 아니다. 순하고 매너좋은 신사로 보이지만 그런 이미지도 선명한 편은 아니다. 지적인 것 같으면서 어떨 땐 멍청해 보이고, 낭만적인 눈매의 한 구석엔 경건함의 강박에 주눅든 신부 지망생 같은 소심함이 깃들어 있다. 그런 엇갈린 느낌들이 신비감을 주기보다 산만하게 퍼져 있는, 쉽게 말해 평범한 얼굴에 가깝다. 그런데도 배역의 폭이 넓다. 악질 나치 장교(<쉰들러 리스트>), 순정파 파일럿(<잉글리쉬 페이션트>), 연쇄살인범(<레드 드래곤>), 리버럴한 상원의원(<러브 인 맨하탄>)….

극에서 극으로 갈리는 이 역할들 사이에도, 본인의 말을 들어보면 어떤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 “사람들의 내면에는 반대되는 감정이 공존한다. 나는 거기에 관심이 많다. 그건 언제나 흥미롭다.” 그러고 보면 그가 맡은 캐릭터의 내면에는 폭력성 내지 욕정이 이성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레드 드래곤>의 살인마 같은 악역은 물론이고, <잉글리쉬 페이션트> <애수>에서 로맨스에 빠졌을 때도 상대방은 유부녀였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 자랐지만, “정작 신앙을 받아들인 건 19살 때”였다. 그의 한 삼촌은 베네딕트수도회 신부이고, 다른 삼촌은 케임브리지대학 신학교수였다. “지금도 나는 믿음과 인간의 세속적 본능의 갈등에 매료된다. 그레이엄 그린(<애수>의 원작자) 같은 이는 인간의 양면성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애수>에 대한 애착이 각별하다고 말한다.

<레드 드래곤>과 <러브 인 맨하탄>의 잇단 흥행성공으로 랠프 파인즈는 요즘 즐겁다. <쉰들러 리스트> <잉글리쉬 페이션트> 등 이전에도 히트작이 있었지만, 정작 그가 큰 스튜디오의 상업영화라는 점에 주목하고 뛰어든 <스트레인지 데이즈>와 <어벤저>는 참패했다. “두 영화의 흥행실패는 얼굴을 한방 맞은 것처럼 충격이었다. 오로지 흥행에 성공시키자고 만든 영화가 그렇지 못했다면 어떻겠는가. 나는 상업영화에 조심스러워졌고, 내가 거기에 안 맞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뒤 잠시 닐 조던(<애수>), 이스트반 자보(<선샤인>) 같은 유럽 실력파 감독의 영화로 방향을 틀다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레드 드래곤>에 계약했다. “문학적이지 않은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고, 만나자마자 “우린 엄청 많은 돈을 벌 거야”라고 말하는 제작자 디노 디 로렌티스의 ‘당당함’도 밉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저예산영화 <스파이더>에서, 정신병원에서 갓 나온 정신질환자를 연기했다. <레드 드래곤>과 마찬가지로 그가 관심 갖는 내면갈등에 부합하는 캐릭터였다.

<러브 인 맨하탄>에 출연한 건 다른 역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만날 복잡하고 꼬인 사람과 함께 있는 건 좋은 일이 못 된다. 코믹한 역할에 목이 말랐다. 야회복 한번 입어보고 싶었다.” <러브…>에서 제니퍼 로페즈의 상대역을 맡은 랠프 파인즈는 자주 웃는 눈매가 따뜻하긴 했지만, 이렇다할 개성없이 밋밋했다. 영국 언론 <가디언>은 이 영화에서 가장 보기 싫은 세 인물 가운데 그를 두 번째로 꼽았을 정도다. 본인 스스로의 평도 후하진 않다. “달콤한 영화지만 좀더 장난스럽고, 맵고, 각이 있었으면 싶다.”

사진작가 아버지, 소설가 어머니의 예술가 집안에서 빅토리아 시대 극장을 축소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자라 영국왕립극예술아카데미, 로열셰익스피어극단을 거친 그는 정통코스를 밟은 엘리트 연기자다. 배우 알렉스 킹스턴과 이혼한 뒤 95년부터 18살 연상의 배우 프란체스카 애니스와 함께 산다. 인생에 가장 영향을 끼친 책이 ‘셰익스피어 희곡 전부’이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제일 좋아한다는 그는 할리우드가 ‘소음 공장’ 같다고 말한다. 얼마 전 연극 <토킹 큐어>에서 심리학자 칼 융을 연기했고, 조만간 입센의 <브랜드>로 무대에 선다. “런던의 무대에 서 있으면 당신 영화는 어떻게 돼가냐는 질문으로부터 수백만 마일 떨어져 있는 거다. 흥행 몇위가 됐느니 하는 말들이 일종의 미친 소리로 들린다. 나는 단지 연기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의 다음 영화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캐스린 비글로와 다시 한번 작품을 하고 싶고 아니라면 데뷔하는 젊은 감독과 일하고 싶다. 나이든 감독과 있으면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처럼 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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