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새롭게 본다는 건 어떤 습관 하나를 바꾸는 것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한편 그만큼 흥미롭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임성민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윤락업에 종사하는 한 여성이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벌어지는 우여곡절을 그린 이 영화에서 그는, 주인공의 절친한 친구이자 아나운서를 꿈꾸는 윤락녀 세영 역을 맡아 영화배우로 전업했음을 ‘어나운스’했다.
이 배역을 수락하기까지 그는 여러 번 고민하고 그만큼 거절했다. 쉽게 생각한다면 그 이유가 세영의 직업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겠지만, 정작 그가 부담스러워 했던 건 세영이 아나운서 지망생이라는 설정이었다. “아나운서랑 관련된 역할로 연기를 시작하면, 사람들이 ‘아나운서 출신이니까 저런 역할 맡아서 처음부터 쉽게 연기한다’고 생각할 것 같았어요.” ‘임성민’과 ‘배우’라는 두 단어의 조합이 본인에게도 많이 낯설었던 거다. “첫 시사 땐 그냥 얼떨떨했죠. 영화도 눈에 안 들어오고. 두 번째 시사를 하면서부터 정신이 들더라구요.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을 드디어 하게 돼서 눈물도 많이 났어요.”
1991년 KBS 공채 아나운서로 출발한, 방송생활이 7년을 넘어선 임성민은 애초부터 연기에 꿈을 심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원하는 길을 가지 못하는 사연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도 역시 부모님의 반대를 이기지 못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아나운서가 적성에 안 맞았어요. 남한테 지기 싫어서 열심히 한 걸 갖고 주위에서는 제가 좋아서 한다고 보신 거죠.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사실 아나운서는 본인 스스로 뭔가 창조해내는 직업이 아니에요. 주어진 일만 시키는 대로 하면 되거든요. 한마디로 보여줄 게 없어요. 그런데 배우는 다르잖아요.”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던 거다, 보여주고 싶은 게 많은 이 ‘배우 지망생’은.
그는 조급함을 숨기지 않았다. 늦게 출발한 불리함은 이미 각오했어도,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얼마간의 시간을 더 까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이’는 여배우의 생명이자 그에겐 빡빡한 짐이다. 그러므로 당분간 쉴 생각도 없거니와 쉬어서도 안 된다. 본인의 취향과 욕심과 의지가 동시에 반영된 역할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배우 임성민’이라는 어구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습관으로 자리잡을 때까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방송사 카메라들이 가게로 몰려든 순간 세영은 기자의 마이크를 뺏더니 친구의 당선소식을 대신 전달한다. 그 들뜬 목소리와 설렌 표정에 더불어 기억돼야 할 것은, 꿈을 현실로 얻은 세영과 임성민이 동일인물이라는 점이다. 멀리서부터 돌아오느라 조금 늦었지만 그는 이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들뜬 목소리를 듣고 설렌 표정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