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객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함으로써 흥행을 꾀하는 영화들을 ‘최루성 영화’라고들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최루성 영화는 간단한 법칙을 지니고 있었다. 남편이나 아내, 자식이나 부모, 애인 중 한 사람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무조건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객은 내용이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우는 주인공’을 보고 따라서 운다. 이와 같은 ‘따라하기’는 유치한 것 같아도 영화의 프로이트적 힘 중 하나를 표시한다. 관객은 모두 ‘우는 주인공’의 품에 안긴 아기가 된다. 최루성 영화의 호소력은 결국 이와 같은 퇴행적 보편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최루성 영화의 음악은 주인공의 볼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다. 그것이 그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한국 최루성 영화의 음악은 늘, ‘줄줄 늘어지는’ 스트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음악 역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만 좀 울었으면 싶은데 주인공이 계속 우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따라 울게 되듯, 그만 좀 울렸으면 싶지만 이 음악은 절대로 그치지 않고 줄기차게 늘어진다. 그리하여 관객에게 줄기찬 슬픔을 강요하다 못해 나중에는 관객의 귀에 매달려 애원한다. 그 ‘늘어짐’은 내용의 늘어짐과 완전하게 부합한다. 죽다가 살아나고 다시 죽다가 살아났다가 끝내 죽고나면 어디선가 드라마를 끝내기 위해 잃어버렸던 아버지가 나타나는 이 늘어지는 내러티브와 징징거리는 스트링은 일심동체다. 때로는 필름이 늘어져서 실제로 음높이가 저절로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흔히 사진 같은 것을 보고 ‘배경이 울었다’라고 말할 때 쓰는 바로 그 ‘운다’는 형용사에 가까운 자동사는 이 늘어진 음악에도 딱 어울린다. 우리가 지겹도록 들은, 녹음의 기술적인 미숙함과 보존의 소홀함의 결과인 이 ‘징징 스트링’은 한국영화의 눈물 젖은 역사를 말해주는 한 상징이다.
세월은 흘러 바야흐로 21세기. <국화꽃향기>를 보면 몇 가지 신선한 법칙들이 선보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슬픔은 속에 감추고 우는 장면은 가급적 돌아서서 어깨만 들썩이게, 우는 장면 앞에는 즐거운 장면, 그것도 살짝…. 그렇긴 해도 최루성 영화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죽고 자식은 남으며 남편은 자식과 함께 있다. <국화꽃향기>의 내용이다. 예전에 나왔던 <편지>는 반대다. 남편은 죽고 자식은 나무와 함께 남았고 어머니는 그 나무 밑에서 자식을 기른다.
이처럼 최루성 영화의 면면한 전통에 나름의 세련된 옷을 입힌 <국화꽃향기>의 음악 역시 예전의 최루성 영화와는 다른 세련된 옷을 입고 있다. 성시경이 부른 주제가 <희재>는 애절하게 팬들의 가슴에 와닿는다. <산타루치아>를 비롯, 장면에 어울리는 음악이 그때 그때 기민하게 선곡되었고 메인 테마는 차분하고 단정하게 주제를 반영하고 있다.
사람들은 울고 싶은 마음을 예전처럼 단도직입적인 호소에 내맡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