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하면 망하고 망가지면 흥하는 남자,<지구를 지켜라>의 신하균
2003-03-26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 사진 : 손홍주 (사진부장) |
멀쩡하면 망하고 망가지면 흥하는 남자,<지구를 지켜라>의 신하균


그가 연기한 인물들을 한번 연령대별로 열거해보자. 중학생 삥뜯는 고교생 양아치(<반칙왕>), 또 삥뜯는 고교생 양아치(<묻지마 패밀리>), ‘짱’이 되려다가 만날 얻어터지고 돌아오는 고교생(<간첩 리철진>). 군에 갔다. 비무장지대에 개 끌고 다닌다고 상사에게 얻어터지는 북한 병사(<공동경비구역 JSA>). 제대했다. 휘발유 아닌 경유 뿌리고 성냥 갖다대며 자살을 기도하는, 그래서 매번 실패하는 백수(<기막힌 사내들>), 장기 팔다 사기당하는 농아(<복수는 나의 것>). 하나같이 “아이고, 이 화상아!”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었을 ‘화상’들이다. 정말 멀쩡하게 생겼는데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닐까. 드디어 멀쩡한 역을 맡았다. 미국 회사에 다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서프라이즈>). 이런저런 여자의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는 그 인물의 스타일도 쿨했다. <서프라이즈>는 그가 출연한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크게 망했다. 언론도 인정머리 없었다. ‘최악의 영화’에 더해 ‘최악의 캐스팅’, ‘최악의 커플’….



신하균(29)이 다시 왔다. 뭘로? 외계인이 있다고 믿고 외계인을 잡으러 다니는…, 나홀로 MIB 요원, 다시 말해 정신병자로. 단, 속단하진 마시길. 그가 연기한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가 정말 정신병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점증법으로 키워가는 데에 이 영화의 놀라운 매력이 있다. 여하튼 그가 멀쩡하지 않아진 결과, 영화는 훌륭해졌다.



-멀쩡하면 망하고, 비정상이 되면 흥하는 기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나요?



=<서프라이즈>는 작품이 어떻다를 떠나서 내가 모자란 부분이 많았다고 봐요.



-그게 뭐죠?



=작품마다 그 인물로 서 있어야 하고, 거기에 맞는 연기 스타일을 고민했어야 하는데, 그게 조금….



-그보다 왜 자꾸 비정상인으로 출연하는 시나리오를 고르죠?



=배역을 보기보다 이야기가 어떤지를 먼저 보거든요. 코믹하더라도 코미디가 목적이기보다는 수단이고, 내면에는 페이소스가 담기는 그런 걸 찾아가다 보니까 자꾸 그런 역을 맡나봐요.



-악역은 싫은가요?



=하고 싶은데, 시나리오가 안 들어와요.



-고등학생이면 양아치, 어른이면 정신질환자,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자백하듯)세련되고, 도시적이고, 쿨한 건 저하고 잘 안 어울리는가봐요. 내가 연기하기에도 그 반대쪽이 더 편해요. 내 안에 그런 부분이 있나봐요. 어떤 신문에 그렇게 났더라구요. “신하균은 아무래도 로맨틱코미디에는 안 어울렸다”고. 계속 병구 같은 역할 해야죠. 그런데 정말 배우가 되려면 내 취향의 영화만 하기보다 다양하게, 장르적인 영화도 해야 하니까.





<지구를 지켜라!>는 많이 웃기지만 촬영장에선 웃을 일이 드물 만큼 진지했던 모양이다. “병구가 무척 불행하게 자랐고, 커서도 그 과거에 눌려 살잖아요. 6개월 동안 병구의 심정으로 살아야 하니까 촬영장에서 우스갯소리뿐 아니라 별로 말을 안 했어요. 코믹한 장면도 그런 심정으로 연기해야 살아날 거고. 그런 고통 속에서 오는 희열이 있더라고요. 다분히 SM적인. 감독은 가학하고 나는 고통을 받으면서.” 그에 따르면 장준환 감독은 영화의 재기와 달리, 말주변이 안 좋았다. 신하균이 그 말투를 옮겼다. “그러니까 되게 고통스러운 상태인데, 어디선가 열정이 솟는 것 같다고 할까. 왜 아드레날린이 쫙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이 약간만 묻어나오는 그런 거 있잖아.” 신하균은 ‘추상적인 표현이 연거푸 나열되는’ 그 말에서 요구하는 연기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장황함에 휘말려 어느 틈엔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곤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연기했다. 당연히 재촬영이 많았고, 그러는 사이에 장 감독의 장광설과 신하균의 기계적 끄덕임 사이에 나름대로 소통의 질서가 형성됐다고.



<씨네21> 394호에 장 감독이 쓴 연출일지에 따르면 신하균은 자기가 안 해도 되는 역할까지 스스로 떠맡고 나섰다. 유인원이 동물 뼈다귀를 내려치며 도구의 유용함을 발견하는 장면이었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도입부를 패러디한 이 대목에서 신하균이 “얼굴도 나오지 않는” 유인원 역을 자처하며 유인원 탈을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하균의 증언은 달랐다. “장 감독이 ‘병구의 눈과 유인원의 눈에서 같은 감정의 빛이 나오면 좋지 않겠니?’ 하고 묻더라구요. 어떻게 해요. (유인원 탈을)뒤집어썼죠. 나중에 영화를 보니까 그 눈이 무슨 병구 눈이야. 그냥 유인원 눈이지.” 그러나 신하균이 무모할 만큼 의욕적이었던 건 사실인 듯하다.



병구가 친구에게 모욕당한 뒤, 자책하느라 스스로 뺨을 때리며 트럭을 모는 장면이었다. 신하균의 운전면허는 2종 오토. 면허시험장 옆에 있는 임시 교습소에 3만원 주고 반나절 동안 강원도 국도에서 트럭 핸들을 잡았다. 1단기어 상태에서 천천히 달려봤을 뿐이다. 실제촬영에서도 1단으로 달리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전에 들어가 장 감독, 홍경표 촬영감독 뒤에 태우고 달리는 사이 기어가 2단, 3단까지 올라갔다. 와중에 뺨까지 때려야 했던 이 운전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역할에 빠져들면 자제를 못할 때가 있어요.”





다음 영화는 김정권 감독의 <화성으로 간 사나이>. <지구를 지켜라!>와 마찬가지로 우주적인 제목에서 신하균은 또 어떤 덜떨어진 인물을 연기할지 자못 기대도 되지만, 영화는 멜로이고 그의 배역도 멀쩡한 인물이다. 어린 시절 첫사랑의 기억을 17년간 간직하면서 한 여자를 기다리는 시골 집배원이다. <서프라이즈>의 부진을 만회하려는 걸까. “그렇게 멀쩡한 인물은 아니에요. 현실에 존재할까 싶은 사람이에요. 시골스럽고 순수하고 순박하고, 그런 모습에서 웃음이 절로 나오게 하는.” <화성…>의 촬영이 거의 끝나감에 따라, 신하균은 이제 필모그래피에 10편을 채우게 됐다. “매번 작품을 시작하면 연기나 영화에 대해 알 것 같으면서도 끝나고 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이게 뭐지 싶고. 그냥 작품마다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해요. 언젠가는 알게 되겠죠.” 3년 전 <공동경비구역 JSA> 개봉 뒤 인터뷰했을 때와 지금 사이에 그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수시로 얼굴을 붉히고, 영화나 연기에 대해 그럴듯한 한마디 같은 걸 못한다. 아니, 안 한다. 질문을 거창하게 하면 약간 더듬거리면서 최대한 소박하게 답한다. 그러면서 얘기의 수위를 낮추도록 유도한다. 신중한 말투, 성실하고 겸손한 자세는 배우로서 그의 생명력이 길 것임을 예감케 한다. 20대 때의 안성기가 그렇지 않았을까. 3년 전 인터뷰 때 신하균은 이런 말을 했다. “연애가 영화보다 어려워요. 혼자 즐기기를 좋아하는데, 여자 만나면 뭔가 해줘야 할 것 같아 긴장되고.” 지금은 어떤지 물었다. “지금 (배두나랑 연애)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어떻게 해요.” 함께 웃다가 바로 “너무 좋아요”라고 말한다. 한 차례 더 같이 웃다가 떼쓰듯 말한다. “이거 쓰지마요. 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