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8마일>에 대한 걱정을 멈추고 안심하기까지
2003-03-28
글 : 김혜리
거짓말과 다큐 사이의 타협

제목을 어떻게 읽을까부터 고민스러웠던 <8마일>에 대해 애초 나는 약 8마일가량의 거리감을 갖고 있었다. 경험적인 편견에 따르면 스타 에미넴이 주연하는 힙합영화라는 명함은 범용함을 예고했다. 빌보드에서 박스오피스 순위로 수평이동을 기도하는- 혹은 두 예술의 정복을 꿈꾸는- 팝스타들의 영화는 할리우드의 잘 알려진 사고 빈발 지역이다. 최근의 증거사례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머라이어 캐리, 마돈나가 제공한 바 있다. 게다가 에미넴은 남을 규정하길 좋아하는 조지 부시가 “소아마비 이래 미국 어린이들에 대한 최대의 위협”이라고 명명한,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래퍼다. 사람들은 에미넴에게 느낌 이전에 모종의 견해를 갖는다. 논쟁적인 팝스타 비히클에 천재소년의 입지전에 음악영화라. 너무 많은 각운이 미리 정해져 있는 <8마일>은 도대체 옴짝달싹하기 힘든 영화로 보였다.

<8마일>은 <트레인스포팅>에 나오는 스코틀랜드 최악의 변소에 버금가는 더러운 화장실에서 시작한다. 지미(에미넴)는 문을 걸어 잠그고 링에 오르는 권투선수처럼 흐린 거울을 향해 섀도 복싱을 한다. 그의 귀에만 들리는 심장박동 같은 음악에 맞춰 그의 발은 땅을 차고 손은 비트에 따라 공중을 가른다. 때묻은 거울에 비친 파란 눈은 공포를 인정하지 않지만, 지미는 끝내 옷과 변기에 두려움 섞인 위액을 토한다. 클럽 문지기는 그를 비웃고 친구들은 격려한다. 토사물 묻은 셔츠를 갈아입기 위해 지미가 뒤지는 쓰레기봉투는 여자친구와 헤어져 오늘부터 트레일러 파크에 사는 엄마한테 잠자리를 청해야 할 그의 이삿짐이다. 마침내 무대에 오른 지미는 마이크를 잡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는 모욕당한다. <토요일 밤의 열기>를 열어젖히는 청년 존 트래볼타의 활보가 그러했듯이, <8마일>의 도입부는 우리가 알아야 할 거의 모든 것을 최소한의 몸짓으로 오리엔테이션한다. 디트로이트의 공기, 친구들과의 연대, 지미가 처한 곤경을 소개하고, 이 영화가 도취와 극복의 스토리이되 그 경로는 탄탄대로를 조금씩 비껴갈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지미에게 힙합은 유희가 아니라 구토와 질식을 유발하는 숨구멍이라는 사실을 납득함과 동시에 스타 에미넴에게 이 영화가 여가 선용 이상이라는 사실까지 감을 잡는다. 커티스 핸슨 감독은 낭비를 모른다.

원더 보이를 다루는 법

<8마일> 제작소식을 듣고 러셀 크로는 커티스 핸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하지만 에미넴 역은 누가 한다죠?” 첫 번째 걱정- 앞쪽에 방점이 찍힌 ‘에미넴 영화’의 위험성- 부터 짚자. 분명히 <8마일>은 에미넴의 반(半)전기적인 영화다. 영화의 한 장면에는 더글러스 서크의 <슬픔은 그대 가슴에>(Imitation of Life)에서 피부색이 흰 딸이 흑인 어머니를 부정하는 신이 지나간다. <8마일>이 불우한 소년 에미넴이 살아온 삶의 모방이며, 어머니를 부정하고 랩의 검은 세상에서 끊임없이 피부색을 상기하며 버틴 래퍼의 초상임을 확인하는 인용이다. 강력한 스타 이미지는 과연 <8마일>을 위태롭게 흔든다. 에미넴의 명성은 <8마일>의 극적 긴장과 서스펜스를 어쩔 수 없이 반감시킨다. 지미의 초라한 헤드폰에서 에미넴의 강렬하고 오만한 노래가 새어나올 때마다 관객은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백만장자 래퍼의 활극이며, 어떤 방식으로든 에미넴한테 승리가 주어질 거라는 전제를 깨닫고 몰입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에미넴이라는 부담스런 거물은 ‘전문가’의 손에 맡겨졌다. 캐스팅은 커티스 핸슨 감독이 <LA 컨피덴셜> 이전부터 독창적인 혜안을 발휘한 종목이다. 그는 브랫 팩 스타 롭 로우를 사이코 여피로(<배드 인플루언스>), 할리우드의 ‘미네르바’ 메릴 스트립을 근육질 스포츠맨으로(<리버 와일드>), 탕아 마이클 더글러스를 위기의 작가로(<원더 보이즈>) 미덥게 둔갑시켰고, 킴 베이싱어를 미키 루크의 냉장고에서 마침내 구출했으며(<LA 컨피덴셜>), 무명의 토비 맥과이어, 러셀 크로, 가이 피어스의 잠재력을 해방시켰다. 핸슨은 그러나 <8마일>에서 배우를 염두에 두지 않고 연기자로부터 캐릭터를 끌어내는 통상의 작업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 필요한 것은 ‘거짓말’과 다큐멘터리 사이로 귀착되는 타협이다. 스타 에미넴의 이미지와 카리스마를 내버려두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에미넴의 얼굴을 커다랗게 클로즈업하는 것이다.

“연기의 어떤 부분은 감독의 소관 밖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영화가 요구하는 배우의 자질이 피어날 프레임을 부여하는 것뿐이다.” 커티스 핸슨의 말대로 아슬아슬한 <8마일>의 프레임을 성공적으로 채운 것은 ‘배우 에미넴’의 예기치 못한 재능이다. 그는 이렇다 할 연기를 하지 않지만 자기가 표현하고 있는 감정의 정체를 안다. 에미넴은 훈련된 배우가 아니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희로애락을 전염시키는 은막 스타들의 희귀한 천품을 나눠갖고 있다. 에미넴의 눈동자는 강철처럼 서슬 퍼렇지만 그것을 에워싸고 이따금 깜박이는 속눈썹은 나비 날개처럼 예민하고 그의 얼굴은 시종 분노로 긴장해 있지만, 우리는 그가 분노하는 대상이 눈앞의 무엇이 아니라 훨씬 복잡하고 거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어차피 관객이 에미넴을 잊을 수 없다면 영화 속 지미도 에미넴과 헤어질 수 없다. 이를 지나치게 인정한 나머지 <8마일>은 노골적으로 뮤지션 에미넴을 변명하기까지 한다. 여성 혐오와 호모포비아, 총을 난사하는 가사로 비난받아온 에미넴은, <8마일>에서 엄마를 보호하고 어린 여동생에게 눈물나게 아름다운 자장가를 불러주고 놀림받는 게이 동료를 감싸며 총을 휘두른 친구를 타이른다. 요컨대 이것은 바람직한 협상이다. 커티스 핸슨과 에미넴은 영화의 주제에 기본적으로 합의했고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주류에 호소하는 서브 컬처에 관한 성실한 영화를 만들었다. 서른이 된 ‘앵그리 영 맨’ 에미넴은 화해를 수용했고 커티스 핸슨은 에미넴에게 과도한 노력을 주문하지 않은 채 든든한 조연진으로 그를 보호했다. <8마일>에 대한 가장 큰 걱정은 그렇게 무마된다.

경계의 게임

‘8마일’은 디트로이트의 빈민들이 사는 퇴락한 다운타운과 좀더 유복한 교외 주거지를 가르는 경계를 지칭한다. 이 지리적, 심리적 선은 영화에서 부단히 등장인물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지미의 상황을 가리키는 좌표 역할을 한다. 영화 <8마일> 역시 주류 드라마 공식의 경계를 시종일관 염두에 두고 치밀한 게임을 운영한다. 영웅담을 보러가는 관객은 주인공을 가로막을 일정한 장애와 대결, 로맨스를 점친다. 한편 슬럼가를 무대로 한 랩/힙합영화를 보러가는 관객은 특정한 갈등과 클라이맥스, 후렴을 예상한다. <8마일>은 영웅담/성장영화의 궤도를 회전하면서도 훈련된 관객이 품는 모든 기대의 충족을 교묘하게 유예하고 교란시킨다.

<8마일>은 몇번씩이나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리지만 당기지 않는다. 감독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 덫에서 발목을 뺀다. 게토영화에 흔히 나오는 밤 드라이브 장면에서 지미 패거리는 페인트 총탄으로 위험한 장난을 치지만 소극으로 끝난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미는 첫눈에 통하는 모델 지망생 알렉스를 만나지만 미래의 약속 따위는 없다. 엄마의 난폭한 애인과 지미의 멱살잡이가 벌어질 때 관객은 파국을- 여동생이나 엄마가 다치는- 조마조마하게 기다리지만 일상은 멍이 든 채로 계속된다. 꼭 집어 말해서, <8마일>은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만들고 그로 인해 선량한 주인공이 일생을 망치는 미친 짓을 하게 몰아세우는 흔한 전략을 쓰지 않는다. 지미는 <보이즈 앤 후드>의 아이스 큐브와는 다른 길을 밟는다. 지미의 패거리 ‘313’과 라이벌 ‘프리월드’의 대결 도중 발생한 총격도 우정이 심화되는 계기로 기능할 뿐이다. 길거리영화다운 폭력은 모두 안전장치가 잠겨 있다. 섹스는 건조하고 폭력은 희석됐고 랩 가사조차 온건하다. “<8마일>은 랩영화가 아니다. 힙합영화는 총과 마약이 잔뜩 등장하는 랩 가사의 일러스트레이션이 되기 쉽다. 하지만 <8마일>은 힙합 가사 그대로 인생을 살지는 않지만 가사에 스민 정서에 공감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다”라고 커티스 핸슨은 그가 신중하게 설정한 <8마일>의 입지를 설명했다.

폭발과 반전이 빠진 공백을 채우는 것은, 지미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무엇을 갈망하고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 드러내는 일화의 차근한 집적이다. <8마일>의 중요 갈등인 지미의 무대공포증은 별다른 치유의 계기없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저절로 해소된다. 하지만 관객은 의아해하지 않는다. 그제껏 <8마일>이 관찰한 지미의 재능, 엄마를 향한 애증, 누이에 대한 책임감, 생존 의지, 의리가 그려보이는 캐릭터는 어떤 특별한 쇼크보다 설득력 있게 지미의 자정과 치유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8마일>의 시나리오는 마지막 절정에 흥미로운 한쌍의 선택을 한다. 안면을 통해 음반 취입을 성사시키려던 지미의 꿈은 무산되고, 파산한 엄마는 빙고게임에서 느닷없이 3200달러를 따온다. 한층 터무니없는- 그러므로 영화의 전체 톤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우연을 끌어들임으로써 <8마일>은 가난한 천재가 메인스트림의 스타로 등극하는 뮤지컬의 관습이 빙고 당첨보다 훨씬 황당한 설정이라고 넌지시 강조한다. 그처럼 <8마일>은 구제 브랜드 청바지처럼 대중성이 검증된 장르를 고수하면서도 이곳저곳을 찢고 탈색시켜 개성을 주장한다.

멜로디 없는 뮤지컬

스타 비히클, 내러티브의 공식 다음으로 <8마일>이 건너야 할 함정은 뮤지컬 장르와의 승부다. 대개의 뮤지컬영화와 스포츠영화는 클라이맥스에 화려한 쇼타임을 벌이고 승천한다. 격투기의 링과 유사한 무대에서 두 랩퍼가 벌이는 ‘배틀’로 절정을 장식하는 <8마일>도 <록키>나 <플래시댄스>식의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커티스 핸슨은 <8마일>을 스스로 선택한 랩이라는 장르의 특성, 즉 멜로디를 거부하고 자연적 발화에 근접하는 랩의 속성을 구체적으로 반영한 뮤지컬로 만들었다. <8마일>은 뮤지컬 시퀀스의 판타지를 위해 드라마를 멈출 필요가 없다. 급식트럭 앞에서 주차장에서 할말 있는 사람들이 둥글게 웅성대면 그것이 곧장 무대의 경계가 되고 프로시니엄 아치가 된다. 랩 배틀이란 결국, 서로의 자존을 걸고 적과 독대한 상황에서 순발력 있게 힘있는 나만의 언어를 찾아내고 조합해 자기를 방어하는 싸움이다. 그것은 살아남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투쟁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미가 가진 랩의 재능은 음악적 천재성이라기보다 삶을 돌파하는 능력의 메타포로 읽힌다. 노련한 커티스 핸슨은 랩 무비의 관습적인 설교를 드라마 속에 용해시키고 힙합음악을 드라마에 종속시킴으로써 거꾸로 힙합이 대중적으로 발휘하는 파워의 핵심을 건드린다.

배틀 챔피언에 오른 지미에게는 부와 명예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지 않는다. 그는 록키처럼 영광의 피멍이 얼룩진 얼굴로 연인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지도 않는다(대신 지미와 알렉스는 가운데 손가락을 서로에게 다정하게 세워보인다). 지미는 지난주의 모욕을 설욕했을 뿐이고 다음주에 닥칠 또 다른 모욕에 조금 의연해졌을 뿐이다. 그가 ‘프리월드’의 챔피언 파파독에게 승리한 비결이 상대가 가진 것을 나열하고 자신의 결핍을 독하게 까발리는 전략이었다는 점은 기억할 만하다. 나는 내가 쓰레기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를 어설프게 쓰레기라고 말하는 것을 더욱 용납할 수 없다. 너희가 에미넴을 알아? 너희가 힙합을 알아? 너 자신만 안다면 그런 것쯤 몰라도 돼! 그렇게 외치는 <8마일>은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조명이 꺼진 다음 철강 공장으로 돌아가는 지미의 모습으로 끝난다. 그리고 우리는 지미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마쳐야 할 잔업이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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