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햇살 가득한 주말, 하루종일 빈둥거리다 전시회를 보러갔다. 물방울 무늬 가득한 전시장에 서 있는데 갑자기 겨울 고속도로로 튀어나온 개구리처럼 뜬금없이 이나영이란 이름이 떠올랐다. 평생을 정신병원을 들락날락거렸을 만큼 분열증과 강박증으로 고생했던 이 일본 아줌마의 특별할 것 없는 ‘땡땡이’무늬의 끝없는 반복이, 텍스트로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의 충격이 가져온 부작용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내 머릿속은 온통 이나영과 이 공간이 꽤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결국 표지촬영을 이곳으로 정하고 개관 전의 전시장으로 그를 불러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나영은 들어서자마자 이 괴상한 곳이 마음에 드는 눈치다. 물방울 무늬의 애드벌룬 위에 앉았다, 누웠다, 굴렀다, 몸생각 안 하고, 협찬받은 옷 생각도 안 하고, 아이처럼 즐거워한다. 그래, 이 여자도 정상이 아닌 게 분명하다.
노랗게 멍든 이나영의 무릎엔 아직도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얼마 전에 어이없게 넘어져서, 어이없게 코도 깨지고, 무릎도 깨졌다. 코에 붙인 반창고는 이제 달아났는데 무릎은 아직 저 모양이다. 요즘 그의 얼을 빼놓은 이는 바로 ‘영어완전정복’이다. 늦은 나이에 학구열에 불타(있긴 하지만)서가 아니다. 4월 초에 촬영에 들어가는 김성수 감독의 <영어완전정복>은 평범한 동사무소 아가씨가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만난 남자 문수(장혁)에게 꽂히면서, 그의 사랑을 정복하기 위해 영어정복길에 들어선다는 로맨틱코미디. 워낙 ‘남자영화’ 잘찍기로 소문난 김성수 감독은 “문수(장혁)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영주는 나영씨가 알아서 해주세요”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하여 이런 얼빠진 증상은 그날 이후 발병한 것으로 추측된다.
시나리오를 고등학교 참고서처럼 끼고 앉아서 ‘밑줄 쫙’ 긋고, 이사람 저사람 붙잡고 깨알 같은 코멘트도 달아보았지만 여전히 정답 페이지는 안 보였다. 사람들은 “영주는 엉뚱하고 특이한 아이야, 이상하고 골때리게 하면 되지 뭐”라고 말했지만 그가 생각하는 영주는 달랐다. “그냥 보통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가만히 관찰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생각보다 이상하고 특이한 행동을 많이 할걸요?” 엉뚱한 상상이라던가, 만화 같은 느낌이 많이 살아 있긴 하지만 괜히 오버해서 웃기는 연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안경을 끼고 머리를 두 갈래로 묶고 나오거든요. 그런 설정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그러나 장르영화가 요구하는 연기톤이란 것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을까? 나 혼자 영화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고민이 끊이질 않는다. “아… 돌겠어요, 아… 걱정이에요.” 코를 찡그리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 특유의 심각한 어조로 걱정한다. 여전히 정답페이지에는 도달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 참고서에는 날 때부터 그런 페이지가 없다.
“이제 일 좀 해야 하지 않겠어?” <영어완전정복>으로 마지막 마음을 정하기까지, 이나영은 좀 오래 쉬었다. 드라마 끝난 것이 지난해 중순이니 겨우 반년 조금 놀았을 뿐이지만 요즘같이 ‘디졸브’로 넘어가는 배우들 스케줄을 생각해본다면 좀 오래 논 셈이다. 그렇다. 다 <네 멋대로 해라> 때문이었다. 그 이전과 이후, 이나영은 좀 달라졌다. 누군가 양동근 이야기를 꺼내면 “정말? ‘복수’가 그랬대?” 하고 되물었다. “뭐가 이렇게 닭살이야.” 멜로영화 시나리오들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동안 ‘네멋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었다. 사실 감염된지도 몰랐고 특별한 약도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은 정말 자기 멋대로 많은 일을 해버렸다. 훌쩍 친구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날아가서 3주 동안 샌프란시스코 시골에 처박혀 있기도 했고, 예전부터 존경해 마지않던 코언 형제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 빠지고, 턱을 꼿꼿이 치켜든 채 단호히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던 <피아니스트>의 이자벨 위페르에 매혹당하고, <디 아워스> 3명의 언니들에게 반하면서 하루하루를 즐겼다. 그러다 어느 날, 양동근이 복수가 아니라 양동근으로 보였다. 일할 때가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 이나영은 신으로부터 내려받은 천부적인 끼를 주체 못해 카메라 앞으로 돌진한 사람은 아니다. 예능프로그램에 나와서 특이한 개인기 하나쯤은 선보일 수 있는 사람이 스타가 되는 세상에서, 그는 어딜 봐도 21세기형 스타감이 아니다(노력은 한다지만). 스텝은 늘 엉키고, 성대모사도 못하고, 노래도 그저 우렁찰 뿐이다. 어디서나 착착 감기는 애교도 없고, 친해지기까지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렇다면 예쁜가. 큰 눈에 시원한 이마, 조몰락거리는 입술까지 하나하나 사랑스런 얼굴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외계인’이나 ‘개구리’를 연상시키는 ‘특이한’ 얼굴이다. 아톰이 하늘을 박차고 나르고 있는 이나영의 가방을 열면 제본된 시나리오, 때가 꼬질꼬질 낀 투명필통과 영어단어장, 중급 일본어교재가 뒹굴고 있다.
흔한 화장품도, 빗도, 거울도 없다. 아직 서른도 안 된 젊디젊은 여배우가 춤추러도 가고, 쇼핑도 다니고 해야 할 텐데, 쉬는 날에는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강아지와 놀거나 할머니와 산책하는 전부다. 푸른색 벙거지 모자가 투명망토라도 되는 양 모자 정도만 써주면 평범한 자기쯤은 못 알아볼 거라고 착각한다. 스타로서의 자의식도 없고, 괜한 겸손이 아니라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지도 않는다. “드라마 잘 보고 있다”고 말하면 “양동근요?”라고 대답하고, “<후야유> 재밌었다”고 말하면 “조승우가요?”라고 받아친다. 이 자신감 제로인 인간이 어쩌자고 배우를 한다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스크린은 TV는 끊임없이 이 ‘나른하고 재미없는 아가씨’를 원한다. 그에 대한 순정으로 달뜬 남자들은 ‘에브리데이’ 미소만 보면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고 수줍게 고백한다. 여자들은 이 소년 같은 친구과 한번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화를 나누는 꿈을 꾼다.
1979년 2월22일 합정동 근처에는 잠시 경미한 흔들림이 있었다. 비밀을 말하자면, 이나영은 그때 그 시간 지구로 떨어진 외계인이다. 언젠가 그는 지구인을 그 ‘텍스트로 설명할 수 없는’ 매력으로 세뇌시키는 임무가 끝나면 훌쩍 우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의 휴대폰에 달린, T셔츠에 박힌, 어깨 위 가방에 숨어 있는 아톰과 함께.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 같은 미친놈만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는 성공가능한 프로젝트처럼 보인다. 믿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