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태생적 힘이 꿈틀,<지구를 지켜라!>의 배우 황정민
2003-04-09
글 : 문석
사진 : 이혜정

<지구를 지켜라!> 시사회장에서 막 나온 관객이 포스터를 다시 보며 중얼거린다. “이상하네. 황정민이 어디 나왔다고….” 그는 분명 <로드무비>의 황정민이나 아나운서 황정민을 상상했으리라. <지구를 지켜라!>에서 병구의 여자친구 순이를 연기한 황정민(34)은 영화계에선 낯선 존재일지 몰라도 대학로에서는 연기생활 만 10년째를 맞는 연기파 배우다. 1998년에는 백상예술대상과 동아연극상에서 신인상을, 2000년에 백상 연기상을 수상했던 그녀는 연출자 오태석이 각별히 아끼는 극단 목화의 간판 스타이기도 하다.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난 황정민은 영화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태생적 힘으로 강 사장을 쓰러뜨린 뒤 “옵빠, 무서어∼”라고 여린 ‘절규’를 내뱉던, 남성적 육체와 여성적 자아의 결합체 순이 대신 시원하게 웃고 왁자지껄 이야기하는 털털한 여성이 앉아 있는 것이다. 이건 최근까지 공연했던 <앞산아 당겨라 오금아 밀어라>를 위해 머리를 짧게 자른 탓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그때 “이게 원래 모습”이라고 황정민이 알려준다.

그녀가 장준환 감독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장 감독의 단편 에 목화의 선배 박희순이 주연을 맡았을 때다. 박희순을 징검다리 삼아 인연을 맺은 뒤 영화를 보러, 또 연극을 보러 서로 오가는 동안 둘은 친구가 됐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황당했지만 재밌더라. 어렵겠다 싶긴 했지만.” 차라리 서커스단 줄타기 곡예를 배우는 것은 나았다. 7살 때부터 한국 무용을 배우며 단련된 탓인지 1개월 남짓 짧은 훈련에도 외줄타기를 웬만큼 할 수 있었다. 발바닥이 무척 아팠다는 점이나 와이어를 매달고 하는 공중회전이 힘겨웠던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녀를 진정 힘겹게 한 건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에 적응하는 일이었다. 무대를 호령하던 황정민이지만, 영화경력은 달랑 <산부인과>의 단역뿐이었으니 진통은 필연적이었다. 촬영 초반에는 관객의 초롱한 눈빛과 숨결을 느끼지 못한 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게 어색했다. 국악예고 2학년 때 10년간 해오던 무용을 저버린 채, 동창 송채환의 손을 붙들고 “연기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무대 위에 올라가면 조명과 관객의 시선이 슈악, 하고 몸을 감아오는 게 좋았다”는 특별한 경험 때문 아니었던가. 4수 끝에 어렵사리 서울예대 연극과에 들어간 것도 무대의 마력 탓이었다. 그런데 이젠 멀뚱멀뚱 카메라를 보고 연기해야 한다니. 어색했다. 자연히 카메라 앞에선 자꾸만 경직됐다. 상대배우와 호흡을 맞추며 연기하는 게 아니라 컷별로 나눠 찍는 방식에도 좀체 적응되지 않았다.

하지만 모니터를 통해 자신의 연기를 객관화하는 데 익숙해지고, 자신의 촬영분량이 없어도 다른 배우의 연기를 끝까지 지켜보는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황정민은 점차 영화라는 매체를 이해하게 됐다. 스스로는 “영화를 보고나니 튀거나 어색하진 않은 정도”라고 다소 야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한 작품만 더 해보면 훨씬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은 일단 확보한 상태다. 사실상의 영화데뷔작인 <지구를 지켜라!>를 통해 깊은 인상을 남긴 황정민은 앞으로 충무로로부터 숱한 초대장을 받게 될 거란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속좋은 미소만을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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