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면을 통해 접한 한 영화사 대표의 다음과 같은 자조 섞인 발언은 나에게 새삼스러운 충격이었다. “영화를 하겠다고 돌아다니는 시나리오의 90%가 코미디다. 이놈의 영화판이 코미디 왕국이 될지 코미디 망국이 될지 두고볼 일이다.” 우선 그 90%라는 수치는 막연한 나의 평소 예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어서 놀라웠다. 그 수치가 과연 엄밀하고 객관적인 통계수치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수치가 일선에서 영화를 생산하는 현장의 압력 체감 지수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의문(코미디 왕국이 될 것이냐 코미디 망국이 될 것이냐)에 대해 답하는 문제는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또 그러한 현상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단은 내 개인적 능력이나 이 지면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문제이다.
어쨌든 그 충격의 여파 탓인지 또 한편의 코미디영화인 <선생 김봉두>를 찾는 내 마음속에서는 계속 다음과 같은 질문이 맴돌았다. 그 90% 중에 실제로 영화로 제작될 수 있는 작품은 몇편이나 될까? 그토록 치열한 경쟁을 뚫고 만들어진 한국의 코미디영화는 과연 진화하고 있는가?
<선생 김봉두>의 포스터에는 배우 차승원이 홀로 우뚝 서 있다. 그런데 그의 표정과 이미지는 기왕의 그것이 아니다.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귀여운 표정으로 ‘웃으면서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은 퍽 자연스럽고 어울린다는 느낌을 준다. 이 포스터의 이미지는 영화 <선생 김봉두>를 잘 요약하고 있다. 포스터가 약속하는 바에 대한 기대로 이 영화를 찾은 관객이라면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배우 차승원의 변신, 웃음과 감동의 휴먼드라마. 이 영화에는 지난해 한국영화 흥행을 이끌었던 <가문의 영광>의 공격적인 웃음 코드와 <집으로…>의 잔잔한 감동 코드가 한데 잘 어울려 있다. 몇 군데 거친 바느질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는 흠이 있기는 하지만, 웃음과 감동을 한데 어우르는 수사법에는 탄탄한 기본이 갖추어져 있다. 이 영화의 진짜 미덕은 차승원을 원톱으로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의 개인기에 안이하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데 있고, 웃음과 감동을 적당히 결합하려 하기보다는 진심으로 감동쪽에 무게중심을 두고자 하는 진정성에 있다. 차승원은 원톱답게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빈다. 몇몇 장면에서 그의 개인기는 빛을 발한다. 그러나 진짜 웃음과 감동을 자아내는 것은 그의 튀는 개인기를 자연스럽게 뒷받침해주는 감독의 전략(수사법)과 동료 선수들의 팀워크(자연스러운 연기)다.
공격적 웃음과 잔잔한 감동을 동시에
이 영화의 가장 눈에 띄는 수사법 중 하나는 적절하게 배치된 반복이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명장면 가운데 하나는, 두번에 걸쳐 반복되는 소석과 봉두의 물수제비 장면이다. 소석의 첫 번째 물수제비 뜨기는 아직은 낯선 선생님에 대한 조심스럽고 수줍은 마음의 표시이다. 시간이 지난 뒤, 소석의 그 몸짓에서 투수의 자질을 발견해내는 봉두의 기발함에는 누구나 웃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기발한 반복이 단지 웃음만을 위한 장치는 아니다. 봉두는, 어떻게든 소석을 전학시킬 빌미를 찾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그 행위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소석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훌륭한 교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말하자면 소석의 수줍은 연서에 뒤늦게나마 답장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단, 아직은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진실에 눈먼 채 그렇게 하고 있다. 그 순간 소석과 어울려 함께 물수제비를 뜨는 봉두의 몸짓에는 천진한 즐거움의 기운이 넘쳐흐르지만, 정작 봉두 자신은 아직 그 진짜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 이중의 천진함(소석과 봉두의 눈멀어 있음)은 웃음과 함께 잔잔한 감동의 여운을 남긴다. 마치 물수제비 뜨기로 인해 일어나는 그 잔잔한 파문들처럼 말이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 설정은, 도시(어른)와 시골(아이)의 충돌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가 기초하고 있는 기본 수사법이고, 자연스럽게 감동어린 웃음을 자아내는 비결이기도 하다. 봉두가 약삭빠른 자신의 이해를 위해 행동하면 행동할 수록 그것은 아이들을 위하는 행동이 되며, 아이들이 봉두의 속셈에 눈멀어 있을수록 그것이 봉두의 발목을 잡는 힘이 된다는 아이러니. 봉두는 자신의 점심 해결을 위해 급식을 추진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점심을 걸러야 하는 소석에게 은혜를 베푼다. 그리고 그에 대한 소석의 애틋한 보은 행위는 결정적으로 봉두의 발목을 잡는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언제나 늦게 도착하는(읽게 되는) 편지(또는 응답)들이다. 봉두가 짭짤한 부수입으로 시작한 최 노인 과외. 문맹이었던 최 노인은 그로 인해 한글을 깨치고 3년 지난 손자의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첫 번째 늦게 도착한 편지. 그런데 봉두는 나중에 뒤늦게 아이들의 편지를 읽게 됨으로써 최 노인의 그 행위를 자기 스스로 반복한다. 이 반복된 지연의 행위는 그 뒤늦음으로 인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개안의 과정을 벅찬 감동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또 뒤늦게 도착한 두개의 편지(응답). 봉두는 자신 속의 ‘악마’를 죽이고 아이들과 함께하기로 결심한 뒤에, 역설적이게도 그제야 비로소, 그토록 바라던 ‘폐교 통보서’를 받아든다. 봉두의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던 아들의 제자들과의 만남은 그가 죽고 나서야 이루어진다. 이 두개의 편지(응답)는 그 뒤늦음 때문에 뒤늦은 깨달음의 가슴 아픔을 증폭시킨다.
도시와 시골의 이분법은 현실의 도피
우리가 이 영화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이미지는 학부모가 봉두에게 건네는 흰 봉투의 클로즈업이다. 영화에서 이 흰 봉투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제작진이 밝혔다시피 주인공 김봉두의 이름은 금봉투(金封套)의 코믹한 변용이다. 말하자면 선생 김봉두는 돈 봉투의 의인화인 셈이다. 그런데 영화 속의 봉투는 도시와 시골에서 다른 방식으로 순환한다. 서울에서의 그것은 끊임없이 도시 공간을 순환하는 일종의 화폐로서 기능한다. 학부모의 작은 성의가 담긴 그 봉투는, 봉두에 의해 아버지의 간병인에게 수고비로, 상급자들에게 성의 표시로 전달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하는 일종의 필요악이다. 봉두의 잘못은 오로지 정도를 넘어선 지나친 과욕에 있다. 그런데 시골에서 그 돈 봉투가 하는 역할은 서울에서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들은 언제나 너무 늦게 도착함으로써 그를 분노케 하고(서울에서 전학 온 학부모가 내미는 흰 봉투), 끝내는 그를 감동시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한다(소석의 손때 묻은 봉투와 최 노인이 건네는 서울의 ‘그것과는 다른’ 봉투). 봉투를 매개로 한 이 도시와 시골의 이분법은, 거부하기 힘든 수사적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진짜 현실로부터 우리의 눈을 가리는 장치일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이 영화의 초반에는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한 통렬한 풍자코미디(블랙코미디)의 뇌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불량 티처’ 김봉두의 행위와 태도는 다소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 느꼈을 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선생님의 차별 대우의 이면을 보여준다. 촌지를 찔러주는 학부모 앞에서 한없이 비굴해지는 선생 김봉두가, 일단 교단에 서면 같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평소 부모의 성의가 어느 정도였느냐에 따라 다른 처벌을 할 수 있을 만큼 당당해진다. 그러나 그런 그도 진짜 힘있는 학부모를 잘못 건드린 탓에 무참하게 무너진다. 이런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틈틈이 눈치껏 상납을 해왔지만 함께 죽을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교장의 협박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 논리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뇌관을 깔아놓기만 한 채 조심스럽게 우회하여 아직 오염되지 않은 산골 오지로 향한다. 그 방향 전환은 무리없이 한편의 가슴 찡한 휴먼드라마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분명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불량 티처 김봉두의, 산골 아이들의 천진한 동심 속에서의 자기정화. 이것이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스틸 사진 속에 담긴 폐교가 된 산내분교의 색바랜 이미지들이 보여주듯이, 그 시골의 정화능력은 현재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에 불과하다. 오염된 도시인들의 추억 속에 남아 있는 마음속의 고향. 과연 그곳에 도시의 타락을 정화시킬 힘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영화는 이러한 의문에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한 장면(개인적으로 그 장면의 상황 설정은 최악의 것이었다)은 영화의 안이한 현실 인식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밭에 물을 대기 위해 깔아놓은 호스와 그것을 밟고 지나가야 하는 경운기 탓에 시작된 마을 사람들의 분쟁. 봉두는 그 분쟁을 슬기롭게 해결함으로써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지나치게 시대착오적이고(웬 새마을운동 홍보영화!) 위험하기도 하다. 그런 문제의 해결에는 도시의 지식보다 농촌의 지혜가 더 필요한 법이다. 과연 시골은 여전히 그렇게 어리석을 정도로 순박하기만 한가? 또는 그래야만 하는가? 물론 이것은 작은 징후에 불과하며 사소한 트집일 수 있다. 또 하나의 커다란 징후. 학생들의 전학을 위해 학부모들을 설득하는 봉구의 논리는 희극적으로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땅의 모든 학부모들의 약한 고리를 제대로 공략하고 있다. 시골의 학부모들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학부모들의 흔들리는 눈빛, 그리고 “거리마다 푸른 꿈이 넘쳐흐르는” 서울 찬가를 부르는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빛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봉두를 좌절하게 하는, 아이들의 그 유혹에 대한 저항 논리는, 너무나 순박한 것이어서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 순박성은 결국 도시가 시골에, 어른이 아이에게 투사한 판타지에 불과하다. 그 오염되지 않은 마음의 고향에 대한 판타지는 애잔한 감동과 함께 잠시 우리의 오염된 현실을 잊게 해주고 위안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감동이 크면 클수록 한국의 코미디영화가 아직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그 한계에 대한 아쉬움도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