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찬 여성에서 떠도는 여인으로 세월의 더께 배종옥 연기의 변화
<질투는 나의 힘>이 주는 또다른 즐거움은, 작은 텔레비전 상자에 갇혀있던 배우 배종옥을 <걸어서 하늘까지>(1992) 이후 10여년 만에(그는 97년작 <깊은 슬픔>은 자신의 ‘본격적’인 영화에서 제쳐놓는다) 스크린에서 만난다는 사실이다.
“의사가 곡기를 먹으래”라며 텅빈 냉장고 곁에 뻥튀기 한봉지를 두고 사는 성연의 얼굴을 볼 땐 가슴이 휑하게 쓸쓸하다. 그는 성연을 ‘과거에 커다랗게 믿었던 부분에서 상처를 받은 여자, 그 순간 빠질 수 있는 공황상태에 있는 여자’일 거라 생각했다. “늘 담배와 술을 가까이하는 여자, 나를 그냥 내버려두고 사는 여자, 내 감정 가는 대로 사는 느낌의 이런 자유로운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게 즐거웠어요.”
아마 드라마 <거짓말>과 <바보같은 사랑>이 없었다면 배씨의 이런 모습은 몹시 당혹스럽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한때 그는 ‘당돌한 커리어우먼의 표상’ 아니었던가. 당찬 여성에서, 무너질 듯한 삶의 여성에서, ‘세상을 부유하는’ 듯한 성연에 이르기까지 배씨는 한겹한겹 새로운 이미지를 덧입혀왔다. 완전한 변신이라기보다, 세월과 함께 쌓인 변화가 선후 없이 조금씩 안에서 비쳐나온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배씨가 “성연이 참 나이를 알 수 없는 여자 같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라 말할 때, 그 말은 그 자신에 대한 말 같기도 했다.
현실은 “아마 내 앞에 성연 같은 인물이 있다면 왜 그렇게 사니, 붙잡고 얘기할 것 같아요.” 가끔 “스스로 자학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야 할 일을 노상 꼽고, 작품에 들어가면 세상사·가족사에 신경을 꺼버려야 한다는 배씨다.
성격이나 말투 모두 배씨는 선명했다. 그동안 영화를 외면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그는 “벗는 게 싫어서요”라고 딱 잘라 말했다. <질투는…>의 시나리오에는 원래 성연의 가슴 노출 장면이 있었다. “정말 하고 싶은 캐릭터인데 도저히 감독님이 바꿀 수 없는 장면이라면 다른 배우를 선택해달라 감독에게 전화했어요.” 문화예술인 대상 시사회가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서 “저기 머리 곱슬한 분도 감독님이에요”“저 감독은 어떤 영화 만들었죠” 스스럼없이 물어보는 것도 아는 척-있는 척 하는 것보다 명쾌하다. 그 선명함이, 여배우들에겐 (참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치명적’이라는 이혼을 겪고도 끊임없이 시청자와 관객에게 ‘새로운 발견’을 안겨준 배우 배종옥의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