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셀로판, 그게 내 이름. 나는 보이지 않으니. 내 옆을 지나치고, 내가 거기 있는 것도 모르니.” (<시카고> 중에서)2002년 이전이었다면, 존 C. 라일리를 ‘미스터 셀로판’이라 부르는 게 이상하지 않았을 거다. 1989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전쟁의 사상자들> 이래, 30편 가까운 작품에 등장하는 동안 그는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혹자는 ‘칼 말덴 풍의 코의 소유자’라고, 혹자는 ‘양배추꽃처럼 생긴 얼굴’이라고 부르는 외모의 그는 늘 주연 옆에 있었지만, 빛을 투과시키는 셀로판지처럼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번의 남편과 한번의 악당. 라일리의 2002년은 화려했다. 그는 <굿 걸>에서 제니퍼 애니스톤의 남편으로, <디 아워스>에서 줄리언 무어의 남편으로, <갱스 오브 뉴욕>에서 ‘죽은 토끼파’를 배신한 ‘해피 잭’ 멀레이니로, 그리고 <시카고>에서 르네 젤위거의 무력한 남편으로 각각 출연했다. 그중 <디 아워스> <갱스 오브 뉴욕> <시카고> 3편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로 오르면서 라일리의 모습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출연한 3편의 영화가 동시에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경우는 1939년 토머스 미첼에 이어 두 번째지만, 당시 작품상 후보는 10편이었던 탓에 그의 기록은 더욱 값져 보인다.
1965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존 C. 라일리는 어린 시절 손꼽히는 문제아였다. 일찌감치 시카고의 ‘비열한 거리’를 누비고 다닌 통에 그의 가정통지문의 ‘자기 제어 부족’ 항목은 항상 까맣게 체크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엔 에너지가 많았다. 난 미숙했고, 한마디로 미친 아이였다.” 그때 한 친구가 지역사회에서 제공하는 연극 교육 프로그램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경찰에 쫓겨다니는 신세”가 됐을지도 모른다. 연극은 그의 과잉된 에너지를 빨아들였고, 미래를 결정해줬다. 연극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몇편의 연극에 출연한 그는 <전쟁의 사상자들>에서 조연 자리를 따낸다.
이후 <폭풍의 질주> <그림자와 안개> <길버트 그레이프> <조지아> 등에서 그리 크지 않은 역을 맡던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평생 동지 폴 토마스 앤더슨을 만난 것이다. 그는 ‘감독들의 신병 훈련소’라는 선댄스 뉴 필름메이커스 워크숍에서 앤더슨을 만났고, 순식간에 친해졌다. 세상과 사람, 영화를 보는 눈이 비슷했던 둘은 절친한 단짝이 됐으며 앤더슨은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에 그를 기네스 팰트로의 상대역으로 출연시킨다. 라일리와 앤더슨은 <부기 나이트>와 <매그놀리아>를 통해 우정을 이어갔고, 명성 또한 키워갔다. 앤더슨과 그의 관계를 알게 해주는 일화 하나. 2000년 마틴 스코시즈로부터 <갱스 오브 뉴욕>의 시나리오를 받은 라일리는 앤더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방대한 시나리오에 내 역할은 미약한데, 로마까지 가서 그렇게 오래 있어야 할까?” 전화기 안에서 앤더슨의 천둥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 미쳤어? 역할은 중요치 않아. 그가 오라고 했다면 넌 그냥 가면 되는 거야.”
<시카고>는 그를 오스카 남우조연상 후보뿐 아니라 가장 주목해야 할 배우 중 하나로 끌어올린, 그야말로 출세작이었다. 약아빠진 아내에게 이용만 당하는 ‘핫바지’ 에이모스 하트는 그동안 그가 쌓아놓은 캐릭터의 총합이라 할 만했다. 이 가련하기 짝이 없는 남편의 초상은 마치 준비된 가면처럼 그의 얼굴에 딱 들어맞았다. 한 신문기사의 제목처럼 그는 ‘승리한 루저’였다. 라일리에게 <시카고>는 8살 때부터 자신을 뮤지컬의 길로 인도해준 고향 시카고로의 금의환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당장 자신이 슈퍼스타가 될 거라 착각하는 것은 아니다. “톰 크루즈처럼 되고 싶냐고? 아니다. 그들이 누리는 모든 명성과 영광, 돈만큼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앞으로도 구질구질한 삶의 도랑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줄 건 확실하다.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스타의 화려한 삶보다는 사랑스런 아내, 두 아이와 정상적인 생활을 갈망하는 그는,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무명성을 간직하려 한다.” 존 C. 라일리는 진짜 미스터 셀로판이 되려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