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메트로폴리스>는 ‘아톰’의 아버지인 데즈카 오사무의 50년 전 작품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원점인 그를 기리기 위해 <은하철도 999>를 만든 거장 린 타로가 감독하고 <아키라>의 오토모 가쓰히로가 각본을 정리해 리메이크된 2D-3D 합성판이 나온 것은 2001년의 일. 리메이크 작품에도 유지된 원작의 기본 골격에 따르면 이미 50년 전에 인간과 로봇의 공존을 그린 데즈카 오사무의 상상력은 초인적으로 비쳐질 따름이다. 물론 2001년판은 그때의 상상보다 훨씬 디스토피아적 관점을 피력하고 있을 것이다.
음악을 맡은 사람은 도시유키 혼다. 이 사람은 재즈 아티스트로 분류된다. 색소폰(특히 소프라노 색소폰)과 플루트를 부는 멀티 플레이어인데 전공은 역시 색소폰. 그의 플레이는 뉴올리언스 재즈에서 비밥과 프리 재즈를 아우르는, 메인스트림 재즈의 본령을 자기 것으로 흡수한 프로페셔널한 넓이와 깊이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재즈의 범주를 넘어선다. 광고, 드라마, 영화음악 스코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전천후 뮤지션이다. 일본의 에 해당하는 <뉴스 스테이션>의 테마를 써서 1989년부터 4년간 지속시킨 경력도 가지고 있다.
그의 음악은 일본 음악이라기보다는 ‘아메리카’의 음악이다. 미국 본토의 음악과 연주 기교, 사운드의 질, 작곡 실력 측면에서 거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손색이 없다. <메트로폴리스>에서 보여주는 뉴올리언스 퓨너럴(장례식) 밴드의 음악에 기초한 정통 재즈는 영화 속의 디스토피아적인 파티장면에 복고풍의 인간미를 넣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 색소폰 소리를 샘플링하여 반복시키면서 재즈와 빅비트 테크노를 섞은 듯한 격정적인 드라이브감을 가진 복합 음악을 선보이기도 한다. 특유의 통속성이 발휘된 스트링을 구사하여 감상적인 느낌을 낼 때도 어느 정도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만화를 통해 이 기묘한 모순적 상황을 살아내고 있는 일본의 문화적 위상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메트로폴리스>는 이미 <블레이드 러너> 식의 구도를 50년 전에 제시한 영화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아메리카를 앞설 때조차 일본은 아메리카의 애완견이다. 음악도 그렇다. 도시요키 혼다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메리카나이즈드’(americanized)된, 즉 미국화된 대중음악을 생산해내는 나라는 다름 아닌 일본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어떤 의미로 일본의 대중음악은 미국보다도 더 미국화되어 있다. 미국의 대중음악에서는 숨겨져 있거나 내재화되어 있는 ‘클리셰’, 즉 상투형들이 일본이 모방생산해내는 미국 음악에서는 톡 불거져 있다. 아마도 일본의 음악가들은 나름의 자부심이 있을 것이다. 일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전후의 ‘팝 컬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름의 기여를 했다. 수혜받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롤랜드사가 만든 808이나 909 같은 전설적인 드럼 머신 없이 어떻게 테크노 문화를 상상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가 바로 그 팝 컬처 자체’라는 일본 사람들의 생각 또한 일종의 착각이다. 일본은 이처럼 실제로 팝 컬처를 주도해온 서구 후기산업사회의 문화 생산자 대열에 명실상부하게 끼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 귀여운 애완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음악에 관한 한 이만하면 빼어난 뮤지션의 빼어난 오리지널 스코어라고 평가하는 데 누구도 주저할 수 없다. 그냥 화면에 붙는 음악이 아니라 들으면서 음미하면 새로운 의미가 솟아나오는, 깊이있는 음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