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유토피아 그리고 위대한 사랑 이야기,<모노노케 히메>
2003-04-22
글 : 김의찬 (영화평론가)
■ Story

어느 부족의 마을에 재앙신이 나타나 마을 사람을 위협한다. 아시타카는 결투 끝에 재앙신을 쓰러뜨리지만 오른팔에 저주의 상처를 새기게 된다. 그는 곧 죽어야 할 운명인 것. 아시타카는 재앙신이 어떤 원인으로 한을 품게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길을 떠난다. 한편, ‘시시’ 신의 숲 건너편에 위치한 타타라 마을은 에보시라는 여군주가 지배한다. 에보시 일행은 식량을 나르던 중 들개의 신에게 습격을 당하지만 총포를 사용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아시타카는 들개의 신 옆에 있는 원령공주를 처음으로 만난다. 원령공주 ‘산’은 에보시의 목숨을 노리고 마을에 잠입하고 아시타카는 그녀의 목숨을 가까스로 구한 뒤 마을을 빠져나온다. 인간들은 ‘시시’ 신의 목을 노리고 숲으로 모여들고 다른 지역에서 몰려온 신령한 존재들은 또한 인간과 대전투를 맞이할 채비를 서두른다.

■ Review

몇년 전, <모노노케 히메>라는 신작 애니메이션을 지면에 소개할 때였다. 제목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가 고민스러웠다. 후보1. 도깨비 공주. 독자층이 이해하기 쉽겠지만 의역이 심했다. 후보2. 모노노케 히메. 적당한 제목이지만 의미전달이 약간 난해하다. 후보3. 원령공주. 원령(怨靈)이 ‘모노노케’의 정확한 번역이라는 점에서 통과. 그래서 당시부터 <모노노케 히메>를 열심히 <원령공주>로 표기했었고 이 작품을 아직까지 같은 제목으로 알고 있는 이가 적지 않다. 이 에피소드는 <모노노케 히메>의 경우 제목을 이해하는 것이 작품 이해에 적잖은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는 최근 개봉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두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이다. 그녀는 ‘산’ 혹은 ‘원령공주’라고 불린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마찬가지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연출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우리는 곤혹스런 경험을 한다. 적어도 이제까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기억한다면 그렇다. <이웃집 토토로> 등에서 그랬듯 그의 세계는 꿈과 비행(飛行)의 모티브를 언제나 담고 있었다. 아스라한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지만 <모노노케 히메>는 상황이 다르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원령공주, 그러니까 ‘산’은 입가에 피를 흘린 채 첫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인간과 맞서 싸우길 주저하질 않는다. 칼을 휘두르며 공중에서 재주를 피운다. 끔찍한 장면도 여럿 있다. 무사의 목이 순식간에 잘려나가고 팔과 다리가 떨어져나간다. 그들의 살점은 사방으로 튄다. 신령한 존재, 즉 외견상 멧돼지로 보이는 동물들이 집단으로 떼죽음을 당한다. 이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변심일까? 그는 더이상 자신이 오랫동안 되풀이했던 철학, 즉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는 견해를 중도에서 포기할 태도를 보이는 걸까? 속단하긴 이르다.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와 많은 부분 흡사하다. 자연의 편에 서서 인간에 맞서는 여자아이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아이는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으며 거의 여신에 근접한다. 아이는 인간들의 편에 선 아시타카라는 소년과 우정을 나눈다. 재앙신의 덫에 걸려 곧 죽을 운명이 되어버린 아시타카는 ‘산’과 교류하면서 자연의 위대한 힘을 깨닫게 된다. 작품의 줄거리에서 감지할 수 있듯 <모노노케 히메>는 <반지의 제왕> 등의 판타지 작품이 그랬듯 분열된 세계의 갈등을 서사의 주요한 축으로 삼는다. 갈등은 인간세계와 대자연이라는 구도로 짜여진다. 세부적인 갈등은 중세가 배경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일본의 과거로 우리를 인도한다. 작품 배경이 되는 무로마치 시대는, 일본 역사상 중요한 시기다. 산림을 개척하고 제철업이 활기를 띠면서 일본은 자연을 통제하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당시를 일본의 현대사와 비교하면서 “위험한 성장을 거듭하는 시기”라고 논한 적 있다. 여기서 ‘산’이라는 야생의 소녀는 본래 이름인 ‘산’, 그리고 그녀에게 위협감을 느끼는 인간사회에선 ‘원령공주’로 통하면서 이중적 삶을 살게 된다.

"자연과 인간의 공생이라는 생태학적 주제"라는 관점이 일본 평단의 일반적 시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모노노케 히메>는 유토피아, 그리고 위대한 사랑 이야기다.

많은 일본 비평가들은 <모노노케 히메>가 지니는 애니미즘적 태도, 그리고 일본 전통신앙과의 관계에 주목했다. 사에코 준코가 지적했듯 “자연과 인간의 공생이라는 생태학적 주제”라는 관점이 일본 평단의 일반적 시각이다. 반면, 서구의 시각은 차이가 있다. 줄리아 세르토리는 “이 작품을 생태학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 오히려 모든 존재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이라며 흥미로운 견해를 제출한 바 있다. 모든 견해차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유토피아, 그리고 위대한 사랑 이야기를 그려냈다는 것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일본 개봉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키네마순보>에서 평론가 사토 다다오와 대담을 나눈 적 있다. 당시 그는 “생활하다보면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장소와 시간, 그리고 빛에 주목하게 된다. 이것을 또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다보면 어느새 자연주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작업의 특징이 아니겠는가”라며 반문한 적 있다. <모노노케 히메>는 인상파 화가들이 ‘빛’을 화폭에 옮기듯 섬세하게 작업한 결과물이다. 마른 땅에서 풀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밝은 햇살이 비추는 것만으로 <모노노케 히메>는 충분히 관객을 웃고 울린다. 창문 밖으로 자연의 초록빛을 보며 잠시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언젠가 들려줬던 옛날이야기를 마음 속 어딘가 곱게 간직하고 있는 탓은 아닐지.

:: 미야자키 하야오 인터뷰

" 다음 작품은 90살 할머니 된 여자아이 이야기"

지난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내놓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게 전작 <모노노케 히메>에 대한 해묵은 궁금증을 털어놨다. 이 인터뷰는 <모노노케 히메>의 수입사인 대원C&A와 홍보사 영화인의 도움으로 서면으로 진행됐다.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과 오스카에서 수상한 것을 축하한다. 당신의 작품이 범세계적 공감과 지지를 얻고 있는 비결은 뭘까.

나는 결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결국은, 국제적으로도 어필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 같긴 하지만.

- <모노노케 히메> 이후 작품의 스피드와 스케일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닮아간다는 의견도 있다.

할리우드에선 내 작품이 할리우드영화와는 근원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나는 할리우드영화는 물론 영화는 거의 보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라는 건 선배의 것을 받아들이고 소화한 뒤에 후배에게 전수하는 것이니 만큼, 뭔가 다른 영화에서 영향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 <모노노키 히메>는 공공연하게 당신의 ‘은퇴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나는 항상 ‘이 작품이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한다. <모노노케 히메>의 경우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거기서 끝낼 수 없었다. 새로운 감독을 기용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능한 한 젊은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만, 그럴 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내가 하고 있는 것이다.

- <모노노키 히메>는 ‘자연과의 교감’을 다룬 일련의 작품 중 마지막 스토리다. 인간과 자연의 갈등과 대결에 대해 당신이 도달한 결론은.

인간은 자연과 투쟁하는 문명을 구축해왔다. 자연이 문명을 파괴하려고 할 때, 문명 또한 위험한 상태에 처한다. 나는 그 곤란하고 어려운 화제에 도전할 시기가 온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한 시기, 아마도 무로마치 시기 정도에 일본인은 사자신을 죽이고, 성스러운 자연에 대한 경의를 잃어갔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런 모든 전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 <모노노케 히메>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폭력적인 장면들이 나온다.

전쟁이라는 것은 폭력이다. 그 점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이다. 잔인한 장면을 삽입해야 했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는 인기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어린이들에게 더욱 인기가 많은 점에 놀라움과 기쁨을 느꼈다. 어린이들은 본능적으로 이 작품의 본질을 잘 간파했다고 생각한다.

- <모노노케 히메>는 최초로 컴퓨터그래픽을 동원한 작품이다. 그런 작업의 장단점은 무엇일까.

CG는 극히 일부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기존의 촬영에서 사용해왔던 기술에 조금 추가된 기술이라 생각한다. 단, 셀부분에서 부분적으로 디지털 페인트로 표현하였다. 퍼센트로 말하자면, 1/100 정도일 것이다.

- 다음 작품 계획은.

차기작 <하울>은 내년 여름 개봉예정으로 준비 중이다. 영국 동화작가 다이아나 윈 존스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17살 여자아이가 마법에 걸려 90살의 할머니가 되어버리는 이야기이다.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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