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지구를 지켜라!>를 격찬 할 수밖에 없는 이유
2003-04-24
글 : 유운성 (영화평론가)

“…조사는 끝났소. 당신은 당신의 탁월한 상상력을 원망하도록 하시오. 때때로 탁월한 것들은 단지 그 탁월성 때문에 희생되기도 하는 것이오. 그 탁월함의 내용이야 다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그런 희생을 받아왔소.” - 이승우, <수상은 죽지 않는다>

거대한 광기는 그에 걸맞은 정교한 논리를 필요로 한다. 즉 그것은 스스로의 환상을 실현시킬 하나의 세계를 필요로 한다.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세계이다. 근래 보기 드문 최고의 데뷔작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생각건대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여러 장르들의 혼합과 인용을 통해 구성되는 하이브리드(hybrid) 장르들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또한 <지구를 지켜라!>는 영화광적 감수성과 B급 취향으로 단단히 무장되어, 경박한 영화광들에게 경쟁의식에 사로잡힌 숨은그림찾기의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그러한 영화도 아니다(그런 쪽에 각별한 취향을 지닌 이들이라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신작이 어서 빨리 개봉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쎄븐>과 <양들의 침묵>이 보여주는 연쇄살인범의 밀폐된 공간, 의 모노리스, 식의 ‘우주적’ 음모론 내지는 <미션 투 마스> 후반부에 보인 외계생명체에 의한 진화가설, <미저리>의 캐시 베이츠, <길>의 젤소미나와 <블레이드 러너>의 위안부 레플리컨트 프리스 등- 이상 언급한 것들은 특별히 숨은그림찾기의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아니다- 을 <지구를 지켜라!>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해서 이 영화를 위와 같은 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 경솔하게 ‘지구인’ 병구의 광기어린 상상을 외계인-적들의 손에 넘겨주는 꼴이 된다. 우리의 현실을 이 영화들처럼 바라보는 것은 병구이며, 그가 현실을 오직 이 영화들을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감독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결코 혼합장르, 장르의 패러디가 아니며 오히려 지금/여기/이곳의 우리에 관해서는 오직 장르를 통해서밖에는 사유할 없다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영화인 것이다. 그 둘을 혼동하는 순간 오해가 생겨난다. 그런 까닭에, 몇 가지 피상적인 유사성을 근거로 장준환을 팀 버튼에 비견하는 것은, 비록 찬사라 할지라도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 된다. 팀 버튼의 영화에서는 그러한 안타까움을 결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환상과 망상은 다르다

프로이트는 <환상의 미래>에서, 환상의 특징은 인간의 원망에서 유래한다는 점에 있고 이 때문에 정신병적 망상과 비슷하지만 반드시 허위이거나 실현불가능하고 현실과 모순될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현실과의 모순을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취하는 망상과는 다르다고 지적한다. 또한 환상은 증거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지구를 지켜라!>를 떠받치고 있는 환상의 구조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환상을 통해 완성된 병구의 세계에서 우리는 그 기저에 놓인 원망을 발견한다. 원망 없이도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두명의 인물은 ‘줄 위의 젤소미나’ 순이 그리고 강 사장이다. 이들 가운데 순이는 어쩌면 돈키호테 같은 병구의 환상이 만들어낸 산쵸 판사와 둘시네아의 결합물 같은 존재이다. 돈키호테의 환상이 기사도 소설의 세계 속에서 인물들을 재창조한다면, 병구의 환상은 장르영화의 세계 내에서 인물들을 재창조한다. 순이는 멜로드라마의 세계에서 연인을 떠나가는 비련의 여인이 되는가 하면, <블레이드 러너>의 프리스처럼 병구를 뒤쫓는 김 형사를 공격하기도 하고, 마침내는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처럼 로봇팔에 매달린 채 죽어간다. 각각의 장면들은 그녀의 고통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병구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이며 초라하지만 애처로운 상상력의 결과일 수도 있다. 이 장면들이 웃음과 슬픔 사이에 놓인 기묘한 감정을 끌어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교한 논리 위에 구축된 거대한 광기는 하나의 세계를 필요로 하고 반드시 만들어낸다. 광부로 일하다 죽은 아버지, 수업료를 내지 않는다고 매질을 가하던 선생, 살인미수로 감방신세를 지게 된 자신을 폭행하던 교도관, 노동쟁의에 참가했다가 구사대에 맞아 죽은 애인, 화학공장에서 일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중독증상으로 식물인간이 된 어머니, 이 모든 일에 대한 단 하나의 원인을 찾아 내려 시도하는 순간 병구의 강박적인 외계인 ‘연구’는 시작된다.

한때 우리는 여러 불합리와 모순의 원인을 찾기 위해 구조 속의 한점, 특별히 인격화된 요소에 집중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시기는 지나갔고 ‘모순의 중층결정’은 상식이 되었지만, 더불어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회의주의적인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알고는 있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단정해버리는 것이다. 자신을 추적하던 김 형사에게 던지는 병구의 말,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고통받고 있을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물음은 정확히 그런 식의 패배론을 향한 공격인 것이다.

이때 음모론은 회의에 맞닥뜨린 이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하게 되는 숭고한 광기이다. 병구는 다시 한번 구조 속의 한점, 인격화된 원인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붓고 마침내 외계인/지구인이라는 ‘황당무계한’ 이항대립의 구도를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이른다. 병구는 안드로메다의 PK-45 행성에서 날아온, ‘로얄분체교감유전자’를 이식받은 유일한 외계인인 ‘꾸오아아떼꾹’(quoaaktekguk)을 납치, 그를 통해 외계인 모선의 왕자와의 교신을 시도하고자 한다. 병구는 스스로가 완성한 세계로 ‘현실’세계에 맞서는 전투를 시작한다.

병구가 노리는 것은 노조간부 폭행교사, 수뢰, 섹스 스캔들, 주가조작의 장본인- 그러나 언제나 그래왔듯 혐의는 있으나 증거불충분과 완강한 부인을 무기로 풀려나곤 하는- 인 유제화학의 사장이자 경찰총장의 사위로서의 강만식이 아니라, 고통을 강하게 겪었기 때문에 좀더 수월하게 유전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병구의 어머니를 실험대상으로 삼은 외계인 꾸오아아떼꾹이다. 병구에게 있어서 강만식으로서의 그의 비리는 자신이 외계인임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저지른, 병구의 말마따나 ‘너무도 평범한’ 행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이것은 정말이지 너무 평범한, 그리고 진부하기까지 한 설정이다. 하지만 그걸 진부하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우리 또한 외계인의 위장에 속아 넘어가고 말게 되기 때문이다. 병구가 병원에서 훔쳐내 상습적으로 복용하는 환각제의 양은 그의 원한의 강도에 비례하며, 이에 대해 외계인은 그 원한의 원인을 자꾸 불가해한 구조 탓으로 돌리고자 한다. “너희 어머니 죽은 게 나 때문이야?” 그토록 진부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병구는 다시 “화만 내면서” 살 도리밖에는 없다.

연대감을 가져라

진부하다고 말하는 우리를 향해,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는 그 거대한 광기의 힘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난 미친 게 아니야!” 병구의 경고대로, 우리는 아직 외계인의 텔레파시를 차단하기 위한 모자를 벗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진부해 보이는 비리 자본가 강만식을 외계인으로 전환시켜서라도 증오의 힘을 간직해야 한다. 우리의 영화가 모종의 패배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지구를 지켜라!>는 환상의 힘으로 거기서 가볍게 빠져나온다. 즉 전략을 포기하지 않은 채 전술의 급진적 변화를 시도한다. 이 환상의 전술을 가능케 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창조주는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 오직 연민의 시선을 던질 뿐이다. 마침내 구출된 강 사장이 차에 오르기 전 잠깐 뒤돌아 서서 던지는 시선은 바로 그러한 연민의 시선이다. 그것은 외계인의 시선이며, 이 지구에서 우리와 함께 존재할 자격이 없는 자의 시선이다.

나는 앞에서 병구의 환상 속에 원망이 없이도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강 사장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병구의 환상을 마침내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외계인이기를 거부하고 비리 자본가 강 사장으로서 자기규정을 함으로써 병구의 환상과 경쟁하던 그가 외계인이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병구는 도리어 혼란스러워진다. 그래서 이 순간은 자꾸 지연된다. 이 ‘영악한 외계인 새끼’는 병구의 환상을 내러티브화한다. 모든 것은 안드로메다 PK-45 행성의 75대조 선왕이 푸른 별 지구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이어지는 그의 ‘우주적’ 규모의 설명은 병구조차 아연실색하게 만들 지경이다. 병구가 자신의 어머니만이 아닌 ‘인류’를 생각하게 되면서 그의 전투는 패배쪽으로 향해가게 된다.

외계인들의 모선에 오른 강 사장이 검버섯이 돋은, 귓볼이 긴 외계인 꾸오아아떼꾹으로 변화되고 결국 지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결말부는 죽어가는 병구가 만들어내는 최후의 환상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는 그토록 불편함을 느껴야 할 이유가 없다(사실 강 사장은 정말 외계인이었다. 영화 초반부, 대리운전자가 몰고 온 차에서 내리던 만취상태의 강 사장이 내뱉은 말을 기억하는가? 잘 들어보면 <지구를 지켜라!>에서 그가 최초로 외계인의 언어로 말하는 때가 바로 이때였음을 알게 된다. 그 알아들을 수 없는 몇 마디 말 뒤에, 그는 건물을 손가락으로 한번 빙 둘러 가리키며 “맞아… 이거 다 내가 만들었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강 사장은 화학공장 사장이지 건축업자가 아니다. 그 말에 담긴 것은 창조주의 자부심이다).

외계인이 병구에게 들려주었던 ‘우주적’ 규모의 내러티브를 가능케 했던 보편적 휴머니즘은 급기야 (역시 ‘우주적’ 규모의) 생태주의를 원용한 종(種) 말살론에 이른다. 따라서 이것은 병구의 환상이 아니라 외계인의 기획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상상력을 모방하고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권력의 속성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이 마지막 장면만큼은 그 의도를 거슬러서라도 ‘거꾸로 뒤집어’ 읽어야 한다. 좀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비리 자본가 강만식이 ‘우주적’ 근심을 품은 외계인 왕자 꾸오아아떼꾹이 되었다고 해서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혹은 <지구를 지켜라!>의 결말을 미이케 다카시의 <데드 오어 얼라이브>식의 냉소적인 자멸극으로 보아서도 곤란하다. 그런 자멸극을 볼 때만큼은 얼마든지 웃을 수 있었지만 여기선 그렇지 않다.

<지구를 지켜라!>는 사실 평가가 아니라 연대감을 요구하는 영화다. 이 황당무계하지만 탁월한 상상력이 그저 재기발랄한 농담으로 치부되고 만다면 그건 슬픈 일이다. 차라리 병구의 광기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편이 낫다. 여기에는 세계관을 건 전투가 있으며 아직 저들을 향한 증오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꼭 필요한 선언, “우리는 지구인이다!” 우리는 절대로 당신들의 죄의식을 대신 걸머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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