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문제의식은 현실에, 현재의 나와 너, 이 세상에 발을 담그고 있어야 한다. 이 문장은 언제나 참이다. 그런데 이 문장 밖에서 ‘장르’라는 외계인을 문장 안에 던져넣어보자. 그러면 문장 안에 일대 혼란이 일어난다. ‘장르’라는 어휘가 침투하는 순간 ‘컨벤션’(관례, 규칙)이라는 새로운 낱말이 튀어나와 문제의식과 부딪히거나 포옹한다. 대개의 경우 부딪힌다. 문제의식은 컨벤션이 못마땅하고 컨벤션은 문제의식을 골치 아픈 투덜이로 생각한다. 넓게 보아 영화라는 장르는 아직까지도 그 부딪힘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컬트영화’가 나왔다. ‘컬트영화’란 무엇인가. 내 개념으로는, 문제의식과 컨벤션이 적절한 긴장관계를 가지고 길항하는 영화가 컬트영화다. 한마디로 ‘컬트’가 되려면 문제의식이 새로운 컨벤션의 옷을 입고 있거나, 컨벤션이 새로운 현실의 문제의식을 몸뚱이로 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장준환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지구를 지켜라!>는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컬트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드문 작품이다. 이 영화는 ‘병구/강 사장’의 계급적 대립에 관한 문제의식에 철저하게 뿌리박고 있으면서 그 대립에 ‘지구수호자/외계인(지구 침략자)’이라는 장르적 컨벤션의 옷을 입히고 있다. 그 둘은 서로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아도 실은 부딪힌다. 그 ‘부딪힘’이 컬트적 가능성을 낳는다.
이와 같은 ‘장르영화’에서는 음악에서도 장르적 컨벤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컨벤션을 쫓아가야 해서가 아니라 그것과 싸우든 함께 얼싸안고 뒹굴든 그것을 상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예를 들어 <지구를 지켜라!>와 관련해서 네 갈래 정도의 음악적 분위기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길>과 같은 네오 리얼리즘에서 들을 수 있는, 서정적이고도 순진한 민중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악. 두 번째로는 <스타워즈> 같은 영화에서 들을 수 있는 전형적인 팡파르. 다음으로는 컬트적 스릴러물에서 자주 들리는 신경증적 소음이 동반된 무조성 음악. 마지막으로는 예를 들어 <펄프 픽션> 같은 영화가 보여주는, 장르 자체에 대한 키치적 메타비평의식이 들어 있는 B급 음악.
이런 음악들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관객의 무의식 속에 ‘규범화’되어 있다. 컨벤션으로 정초되어 있다는 뜻이다. 영화음악이 어려운 것은 바로 그것들에 대한 일종의 비평적 감각이 음악을 만들기 ‘전에’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지구를 지켜라!>의 음악은 어떤가. 이러한 점들을 사전에 고려했나. 음악을 맡은 이동준은 <은행나무 침대> <초록물고기> 등을 만든 베테랑답게 이 영화의 음악이 “히치콕의 날카로운 음감과 <펄프 픽션>의 코믹함이 섞여 있다”고 말한다. 물론 좀더 장르적 컨벤션을 깊게 파고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는 않으나 전체적인 배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음악이 효과음향을 피해가기도 하고 때로는 겹쳐지기도 하면서 넓게는 그 일부로 작용하고 있다.
영화음악가는 소리를 다루는 동시에, 어쩌면 그 전에 그 ‘텍스트’를 다뤄야 한다. 어떨 때는 텍스트와 싸우고 어떨 때는 과감하게 껴안는다. 껴안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표절을 감행하는 일인데, 그것은 창작하는 것만큼이나 예술적 감각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