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웃음을 잊지않고‥ 한발한발 슬픔을 딛고,<오세암>
2003-04-29
글 : 김현정 (객원기자)
■ Story

다섯살배기 꼬마 길손이는 눈먼 누나 감이와 함께 엄마를 찾아 떠돌아다닌다. 단풍이 지는 늦가을, 길손이와 감이는 길에서 만난 설정 스님을 따라 추운 겨울이 끝날 때까지 절에 머물기로 한다. 심심해진 길손이는 온갖 장난으로 절을 휩쓸다가 외딴 암자로 떠나는 설정 스님과 함께 마음의 눈을 뜨는 공부를 하러 간다. 앞 못 보는 감이가 엄마를 만나고도 놓쳐버릴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엄마 얼굴을 모르는 길손이는 감이에게 마음으로 보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결심한다.

■ Review

“누나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하늘처럼 생긴 물인데 꼭 보리밭처럼 움직여.” “지난해 내가 누나 머리에 꽂아준 꽃잎같애. … 화롯불 같다던 그 꽃잎.” 다섯살밖에 안 된 길손이는 눈에 보이는 풍경을 어린아이다운 단순한 문장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동생이 없으면 야트막한 시냇물도 건너지 못하는 누나 감이, 엄마가 매어줬던 색동댕기 색깔이 바랜 줄도 모르는 눈먼 감이에게 머리 위로 떨어진 단풍잎을, 눈속에 피어난 솜다리꽃을, 커다란 날개를 가진 갈매기를 전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어린 남매는 세상에 단둘이다. 길 위에서 살아가는 그 아이들은 나날이 신기한 낯선 동네와 꾸준하게 변해가는 계절과 절실한 그리움을 오직 둘이서만 공유해야 한다. 길손이와 감이는 말로 그림을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을 떠올리는 조그만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정채봉의 짧은 동화를 엷은빛 수채화로 옮긴 <오세암>은 이처럼 한발한발 슬픔을 딛고가는 애니메이션이다. 다섯살 아이가 부처가 됐다고 해서 ‘오세암’이라 이름 붙여진 암자에 얽힌 전설을 바탕 삼아, <오세암>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섬세하게 덧칠했다. 세상을 믿는 길손이는 “나쁜 아이들도 엄마가 있는데” 자기만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작은 동생에게 엄마가 화재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한 감이는 바로 곁에 있는 길손이의 얼굴을 보는 것만이 유일한 소원이다. 오직 한 가지 소원만 품고 사는 남매는 결코 그 소원을 이룰 수 없을 것이고, 남매의 소박한 바람은 아이들도 어른들도 눈물샘에 빠뜨리기 쉽다. 그러나 <오세암>은 청승맞은 한숨 사이사이 험한 세파에도 먼지를 타지 않은 웃음을 잊지 않는다. 가파른 산길에 지친 길손이가 “나 굴러갈래”라면서 또르르 눈 위를 굴러내리는 장면이나 면벽수련에 열심인 스님에게 삐쳐 자기도 벽을 마주하고 앉은 길손이의 모습은 손상되지 않은 동심 그대로에 가깝다. <오세암>은 훌쩍 높은 어른 키에서 아이들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길손이처럼 귀엽게 쪼그리고 앉은 이 애니메이션은 비록 시대가 불분명한 복고의 분위기를 가졌지만, 아직은 착한 아이들과 호흡의 결을 맞춰간다.

길 위에서 살아가는 그 아이들은 나날이 신기한 낯선 동네와 꾸준하게 변해가는 계절과 절실한 그리움을 오직 둘이서만 공유해야 한다. 길손이와 감이는 말로 그리믕ㄹ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을 떠올리는 조그만 시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수십년 전 감성으로 길을 되짚은 것 같은 <오세암>의 성백엽 총감독과 이정호 PD 등은 TV애니메이션 시리즈 <하얀마음 백구> 이후 다시 호흡을 맞춘 팀이다. 우연히 만난 하얀 진돗개 백구와 고아 남매의 정을 굵은 줄기로 세운 <하얀마음 백구>는 한가로운 바닷가 풍경과 마음 착한 사람들이 <오세암>에 고스란히 겹쳐지는 애니메이션. 그러나 극장용으로 제작된 <오세암>은 <하얀마음 백구>가 흔적만 비친 가능성을 좀더 정성들인 화면으로 옮겨놓았다. 구불구불 마음가는 대로 뻗은 시골길과 저물어가는 가을의 농촌, 군데군데 생명의 기운이 남은 겨울 숲길, 한 그루 한 그루 미세하게 변해가는 나무의 색감은 점점 실사와 닮아가는 호화로운 애니메이션과는 또 다른 생기를 지니고 있다. 실물을 촬영해 색을 덧입힌, 세월의 먼지가 곱게 앉은 단청과 탱화는 자본 대신 쏟아부은 수공의 성과가 돋보이는 부분. <섬집 아기>가 흐르면서 산꼭대기 암자의 길손이와 홀로 대청에 앉은 감이가 교감하는 장면은 마음을 담은 그림이 갖는 파장을 전해주기도 한다.

75분으로 간결하게 끝을 맺는 <오세암>은 국내 장편애니메이션 중에서도 눈에 띄게 적은 액수인 15억원으로 제작됐다. 성백엽 총감독은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경쟁할 수 있는 영역을 찾다보니 한국적이고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에 눈이 갔다”고 말했지만, <오세암>은 단순한 생존 이상을 찾는 애니메이션이다. 제작비의 공백을 메운 정성이나 감독의 딸아이를 모델 삼은 정서적 친밀감은 기술적인 완성도를 떠나 호감을 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진돗개라기보다 사람의 얼굴에 가까워 보이는 백구를 내세웠는데도 성공을 거둔 <하얀마음 백구>가 말해주는 것처럼, 애니메이션은 굳이 영화와 가깝게 만들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오세암>은 아이들이 세상을 느끼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방식을 기억하고 있고, 그 때문에 추억도 눈물도 웃음도 낯간지럽거나 부자연스럽지 않다. 욕심없는 <오세암>이 그 제작진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줄 수 있을 정도의 성공을 이룰지는 알 수 없다. 노래 하나로도 마음을 잇는 감이와 길손이처럼, <오세암>의 목소리가 관객 마음에 닿을 수 있다면, 낯익으면서도 오래간만에 듣는 이야기 하나가 퍼질 수 있을 것이다.

:: 여러 색깔의 <오세암>

구도영화에서 현실비판영화까지

동화작가 정채봉은 동화집 <오세암> 서문에 “베어내고 남은 벼포기마다에 하얗게 내린 서리, 그 시린 정기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 가지고 싶습니다”라고 썼다. 전남 광양 한적한 바닷가에서 태어난 그는 짧은 글과 예쁜 그림 속에 놓치기 쉽지만 사는 데 힘이 되는 이야기를 녹이곤 했다. <오세암>은 그가 1980년대 중반에 썼던 동화. 원작은 엄마 이야기는 끝부분에 잠깐 나올 뿐, 길손이가 부처가 됐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종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드러냈다. 애니메이션 <오세암>은 원작의 세밀한 시선을 살리면서도 아이들에겐 힘에 부치는 구도의 길을 들어내고, 남매와 어머니의 관계를 좀더 강조했다. 남매가 길손이와 감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어떻게 갖게 됐는지 생략된 거나 결말이 다소 성급하게 흘러가는 것은 아쉬운 부분.

박철수 감독이 연출한 1990년 작 <오세암>보다는 원작에 충실한 편이다. 김혜수가 안젤라 수녀로 출연한 영화 <오세암>은 길손이와 감이가 엄마를 찾기 위해 가톨릭계 고아원에서 빠져나오는 장면으로 출발해 담백한 원작을 좀더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다. 감이가 겁탈당하고 힘겹게 도착한 고향은 수몰지역이었다는 설정은 ‘동화’인 원작과 달리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세상을 좀더 현실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김혜수 외에도 최종원, 김용림, 조형기, 남포동, 송옥숙, 천호진 등이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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