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한국 신파 장르의 모든 특징들,<나비>
2003-04-29
글 : 김소희 (전 씨네21 편집장)

■ Story

서울로 가고 싶었던 민재(김민종)는 1년 뒤 폼나게 돌아오겠다며 애인 은지(김은정)와 고향을 떠난다. 민재가 깡패와 제비로 전전하는 동안 은지도 서울로 올라와 군 실력자인 허 대령(독고영재)의 첩이 되어 있다. 우연히 재회한 둘은 다시 사랑을 확인하고 함께 떠나려 하는데 때마침 민재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간다. 허 대령의 사주를 받은 황 대위(이종원)가 개입하면서 둘의 운명은 비극에 휩싸인다.

■ Review

영화 <나비>에는 나비를 둘러싼 의미있는 이야기가 두번 나온다. 강원도 횡성의 산간마을에서 토끼구이를 먹고 놀던 민재가 서울로 떠난다고 하자 울며불며 매달리던 은지는 서로 잊지 않도록 문신이라도 새기자고 제안한다. 은지가 예쁜 나비를 고르자 민재는 해골 그림이나 하다못해 위협적인 인상의 나비를 고르겠다고 한다. 걸핏하면 눈물을 그렁거리는 은지의 고집으로 결국 민재도 순하고 착해 보이는 나비 문양을 가슴에 새긴다. 이렇게 해서 착한 나비를 가슴에 달고 1980년대 초반의 서울로 올라온 강원도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삼청교육대에서 일어난다. 민재의 가슴에서 나비 문신을 발견한 교육생들이 찧고 까불기를, 몇년씩 땅 밑에서 애벌레로 웅크리고 있던 나비가 화려한 날개를 펼치는 기간은 한달도 채 못 되고 그나마 비라도 내리면 날개가 온통 젖어서 꼼짝달싹할 수 없다고 한다. 깡패와 제비로, 군 실력자의 애첩으로, 서울이 던져주는 한 조각의 단맛을 핥던 강원도 나비들은 삼청교육대라는 극단적인 폭우에 푹 젖는다.

<나비>는 비극의 숭고미를 지향한다. 구조적으로도 그런 가능성을 듬뿍 내장하고 있다. 이 영화의 첫 번째 모티브인 도시의 유혹과 위험이라는 주제는 수많은 근대 예술에 영감을 제공했고, 특히 한국영화는 태동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가 절대적인 이슈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명이 가닿지 않은 순수한 자연과 인간을 돈과 환락, 부패가 지배하는 산업화된 도시에 대립시키는 구도는 이 영화에서도 반복된다.

예고된 대로, 민재는 깡패 조직으로부터는 “주먹에 정이 많다”는 소리를 듣고, 동료 제비로부터는 “스텝에 정이 많다”는 걱정을 산다. 순수함이란 자본주의적 도시 속에서는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이물질이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면 “폼나게” 살아남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이런 종류의 영화는 순수의 패배를 장렬하게 전시함으로써 도시와 산업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다.

<나비>에서는 도농의 대립, 산업사회의 현실, 삼청교육대 등 모든 굵직한 주제들이 부분적인 역할만을 수행한 채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해 자리를 내준다. 그것이 바로 눈물이다.

<나비>가 택한 1980년대라는 시간적 배경은 이같은 전략을 증폭시킬 수 있는 시기다. 박정희 암살사건은 역설적으로 박정희로 상징되는 근대화 전략이 1차적으로 마무리되었음을 뜻하지만,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세력들이 낡은 체제의 유지를 다시 한번 도모하면서 광주학살이나 삼청교육대 같은 전근대적인 폭력이 속출했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시도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무리한 폭력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민재와 은지는 한 시대가 거친 굉음을 울리며 파열하는 분화구 속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그런데 영화 <나비>가 한쌍의 남녀를 내세워 이 시대를 가로지르는 방식은 무척 특이하다. <나비>는 최근에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우리가 흔히 보아온 어떤 주제도 천착하지 않는다. 도농의 대립, 산업사회의 현실, 군부의 역할, 삼청교육대 등 모든 굵직한 주제들이 부분적인 역할만을 수행한 채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해 자리를 내준다. 그렇다고 은지나 민재 같은 중심적 캐릭터를 탐구하거나 이들의 관계, 삶의 현실 같은 것들을 내밀하게 탐사하지도 않는다. 도대체 이 영화의 목적이 무엇일까?

답은 눈물이다. 은지 역을 맡은 김정은은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70% 정도의 장면에서 내내 울었으며, 김민종은 “이렇게 잘 우는 여배우는 처음 봤다”고 칭찬했다는 말이 아예 보도자료에 적혀 있다. 제작진 내부에서 이미 눈물이 화두였던 셈이다.

눈물을 목표로 하는 영화는 한국영화 안에서 유서 깊은 하나의 장르를 이루고 있다. 바로 신파다. 신파의 역사적인 연원과 사회적인 역할, 장르의 특징 같은 것들은 심사숙고를 기다리는 하나의 연구 주제이지만, 인상비평적으로 말하더라도 신파의 영향력은 아직까지도 지대하다. 멜로드라마와 신파는 끊임없는 변장술을 거듭하면서 서로 뒤섞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은 영화에 폭넓은 영감을 제공한다. 여전히 중요한 흥행코드라는 뜻이다.

<나비>는 한국의 흥행영화들에 신파 코드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감지한 제작진의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의지의 산물인 것으로 보인다. 제작진이 알았는지 몰랐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한국 신파 장르의 거의 모든 특징들을 망라하고 있다. 사회 현실을 거론하지만 그 자체에 대한 천착보다는 주인공들에게 뛰어넘을 수 없는 운명적 비극의 환경으로 제시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는 것,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적 격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영화의 목표를 두고 있으며, 관객이 ‘가슴이 미어질 것 같다’며 펑펑 울 때 영화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등이 그 예다.

그러나 이 전략이 성공적인지에 대해서는 불안한 느낌이 든다. 2003년의 관객에게 신파 코드를 소비한다는 것과 정통 신파영화를 본다는 것은 별개일 것이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을 묘사할 때보다 도철(이문식)과 광팔(김승욱)을 비롯한 조역들을 묘사할 때 더 생동감이 도는 것도 이같은 시대적 감각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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