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바탕으로, 쉽게 잡히지 않는 살인범을 쫓는 형사들과 그 시대를 그린 <살인의 추억>에서, 가장 유력하다고 판단되는 용의자는 의외의 실마리로부터 가닥 잡힌다. 그건, 사건현장과 증거를 담은 필름을 고분고분 현상해 갖다주거나 혹은 동료 형사들이 필요로 할 때 커피를 타다 주는, 태안읍 지서의 유일한 여경 권귀옥이 부각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가 이 연쇄사건들간의 또 다른 공통점을 잡아내면서 우스꽝스런 대화마저 오가던 경찰 수사도 다시 한번 치열해진다. 이야기가 급물살을 타게 되는 결정적 증거의 발견. 별 뚜렷한 개성없는 여자 캐릭터의, 단순히 운좋은 성과였을까. 권귀옥의 똘똘한 목소리와 눈망울만 믿어줘도 그런 생각은 접을 수 있다.
76년생인 고서희는 <박하사탕>과 <오아시스>를 거쳐 왔지만 아직 많은 이들에게 낯이 설다. 그 자신조차 아직 카메라가 낯설다. <박하사탕>의 고서희는, 시대가 앗아간 첫사랑을 못 잊어하는 김영호에게 하룻밤 위안을 주는 아가씨를 연기한 뒤, “다시는 벗는 연기 안 할 거야” 하는 다짐을 세웠다. 그뒤 이창동 감독과의 인연으로 출연한 <오아시스>에서, 지하철 타고 나들이가는 종두 커플 옆에서 남자친구의 머리를 생수통으로 때리는 여대생으로 그는, “딱 2초” 등장했다.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재미도 없는 연극반에 생각없이 몸담고 지내던 고서희가 자신의 진로를 ‘연기자’로 굳히게 된 데는 좀 별난 이유가 있었다. 고서희네 식구들이 1년에 한번꼴로 찾아가는 철학관, 쉽게 말해 ‘점집’ 할아버지가 “얘는 할 게 이거밖에 없어”라고 못박았기에 어머니도 반대를 무르셨단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과에 진학, 2000년 졸업했다. 그리고 이듬해, 공연 10일 전 대타로 투입된 연극 <원더풀 초밥>에서 생뚱맞은 소녀를 대사 한줄없이 연기한 그가,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함께 공연을 보러온 봉준호 감독의 마음을 움직였다.
“연극에 현장감이 있다면, 영화엔 또 다른 현장감이 있는 거 같아요. 카메라를 통과하는 현장감. 그리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지금으로선 연기를 할 수 있다면 다 좋아요.” 각종 서류를 작성할 때 직업란에 ‘배우’라는 말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직도 망설여진다는 그는, 일이 있어 바쁠 때보다 ‘백수’라고 말하는 게 스스로 편해지도록 맘먹은 지 오래다. “한국영화에서 저처럼 예쁘지 않은 여배우가 주인공 될 일이야 없겠죠. 이창동 감독님도 그러시더라구요. 너도 춘향을 꿈꾸냐, 넌 향단이 과다, 라고. 맞아요. 그렇지만 점집 할아버지가 저 이거밖에 할 거 없다고 그러셨다니깐요.” 그 할아버지, 얼마 전 노환으로 돌아가셨단다. “큰일이에요, 우리집 거기 단골인데.” 하지만 권귀옥의 똘망한 눈빛이 원래부터 고서희의 것이란 걸, 앞으로도 잘해나갈 씩씩한 여배우란 걸, 그분이 진작부터 알고 계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믿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