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코믹한 광대극 한판,<블랑쉬>
2003-05-03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Story

부패의 끝에 치달은 17세기 프랑스 왕조. 젊은 날 페론 가문을 몰살하고 추기경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마자랭(장 로슈포르)은 혼란기를 틈타 밀수와 살인 등을 자행한다.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블랑쉬는 마자랭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그녀의 복수극은 마자랭의 밀수품을 강탈하면서 시작된다.

■ Review

<블랑쉬>는 17세기 프랑스를 무대로 활동하는 여걸 도둑을 상상한다. 그녀의 비운의 성장배경과 복수극, 그 완성의 이야기를 실제의 역사와 실존의 인물들 이곳저곳에 끼워넣는다. 하지만 영화는 실제와 픽션 사이를 이어주는 논증과 상상의 줄타기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코믹함을 앞세우기 위해 이야기의 짜임새를 희생한다. 우스꽝스러움은 캐리커처처럼 과장된 캐릭터에 의해 소화된다.

부패한 왕족과 정의로운 도둑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코믹한 광대극 한판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게 서사의 긴장을 바깥으로 밀어내고, 대신 끌어안은 캐릭터의 돌출은 때때로 빛을 발한다. 장 로슈포르가 연기하는 악독하고 치졸한 추기경 마자랭의 역할이 대표적이다. 악마의 가루를 흡입하여 코밑이 빨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블랑쉬>의 인물 부류는 시종일관 이렇게 두편으로 나뉘는데, 비틀거리는 몸짓과 광기의 눈빛으로 약기운을 뿜어내는 마자랭은 그 시대의 우스꽝스러움을 충실하게 대변해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광대들 사이에 끼어 복수의 서사를 몰고 가는 블랑쉬는 이 영화의 기괴한 캐릭터들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혼자서만 진지하다. 혹은 그녀의 존재이유, 즉 부모의 죽음이 다른 이의 죽음으로만 완성될 수 있다는 조건을 기억해내는 순간마다 어김없이 복수의 칼날은 좀더 잔인한 재현을 요구하며 등장인물들을 고깃덩이처럼 난자하고, 화면을 도살장으로 만들어버린다. 부패한 시대의 과장된 캐릭터들은, 잔혹하게 죽어야 구색이 맞는다는 논리가 화면을 지배한다. <블랑쉬>는 마치 60, 70년대 중국 무협영화의 도입부처럼 영화를 시작한다. 그리고서 켄 러셀의 영화에 어울릴 듯한 캐릭터들을 채워넣는다. 코미디가 최전방이지만, 복수극이므로 잔혹한 칼질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게 들어 있어야만 상업영화로서 제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만든 영화다. 프로듀서로 박혀 있는 뤽 베송의 이름이 그제서야 납득된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