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살면서 두번 이 질문을 받았다. 처음은 오래 전 어느 영화전문지 입사면접 때의 질문 항목이었고, 그리고 수일 전, 김혜리 기자의 청탁 메일을 통해서였다. 그동안 기자라는 직업상의 이유로 만난 많은 사람들, 연기자, 영화감독 심지어 얼마 전에 만난 작가 신경숙(잘 알겠지만 그녀는 바로 얼마 전까지 <씨네21>에 기고했었다)에게도 이 질문을 참 쉽게 던지곤 했다. 때로 상대방의 얼굴에서 곤란한 기색이 떠오르면, 의아했다고 고백해야겠다. 질문자 입장에선 ‘내 인생의 영화’란 싱거운 호기심, 너무 쉬운 답변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엔 서걱서걱 소리가 날 정도로 불편한 인터뷰이와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좁혀볼 요량으로 ‘그냥’ 꺼내본 말이기도 했다.
한데 막상 ‘당신 인생의 영화가 무엇이오?’ 하는 물음이 내게 향했을 때 세상에, 이것은 영락없이 엄마가 좋아? 아니면 아빠가 더 좋아? 하는 격이었다! 영사기 과열로 불이 나버린 뤼미에르 형제의 해프닝 같은 사상 첫 영화 시사 이후부터 지금까지, 영화라는 예술 장르는 현대성의 이데올로기 아니, 거창하게 목에 힘주지 않고, 애써 발견하지 않아도 될 생활 그 자체. 언젠가 바람 부는 밤 바닷가에서 한 남자와 그의 선배를 두팔에 끼고 걷다 뛰다 하면서 “꼭 <쥴 앤 짐> 같지 않아?” 했다가 두 남자가 동시에 ‘뜨아’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본 일, <글루미 썬데이>의 피아노 소리만 흐르면 멍해지는 징크스 아닌 징크스. 정확히 다섯번을 시도했으나 결국 엔딩을 보지 못한 <노스탤지어>. 그래도 안개 짙은 날이면 습관처럼 떠오르는 아스라한 안개신.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벽 틈새로 자신의 훔쳐보는 눈길을 의식하면서 흐트러짐 없이 춤을 추는 한 조숙한 여자아이의 믿을 수 없는 관능과 거울 앞에서 그 소녀의 아라베스크를 따라하는 모습을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조용히 사라진 내 어머니. 한밤중에 선배의 차에 올라 담양으로 내달리면서 떠올린 <강원도의 힘>의 그녀들. 이 밖에 생각나지 않은 영화들 모두 내 인생의 달고 쓴 동반자들이었다.
한 가지 발견이라면, 인생길에 동행한 영화일수록 지극히 개인적인 크고 작은 해프닝, 에피소드가 같이하고 있다는 것. 가까이는 <살인의 추억>이, 멀게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잊었을 <아스테릭스: 미션 클레오파트라>가 그렇다. 봉준호 감독이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그 화성에서 사춘기를 보낸 나로서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찾아왔다. 할머니가 선물한 빨간색 재킷을 장롱 속에 고이 보관만 해야 했던(끝내는 한번도 못 입고 버려야 했다) 그 시절, 선정적인 엽기행각이 다시 들춰진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안의 저항감은 언제든지 부풀어질 수 있었다. ‘고맙게도’ <살인의 추억>의 카타르시스는 개인적인 어린 시절의 어두운 기억을 총괄적으로 보듬어주는 ‘진혼곡’이었다.
한편, 국내에서 흥행 부진을 면치 못한 <아스테릭스: 미션 클레오파트라>는 영화의 동시대성을 정말 부담없이, 즐겁게 만끽하게 해준 작품이었다. 약간의 부연설명을 곁들이자면, 이 영화는 사실 너무나 프랑스적인 문화, 역사, 정치, 라이프스타일의 키워드에 충실하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의 정서와 너무나 다를 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내 인생의 영화에 꼭 집어넣고 싶은 이유는, 프랑스 유학 때 부족한 불어 실력을 함양시키려는 ‘교육적인’ 본래 의도를 잊게 한 감독의 능수능란하고 천연덕스러운 ‘요리 솜씨’에 반했기 때문이다. 가끔 영화에서 동시대인의 동질감을 욕설과 은어, 섹스와 폭력의 패턴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곤 했다. 아니면 다른 한쪽에선 지금 나와 당신이 결코 입에 올리지 않을 화석 같은 단어와 화법을 구사하든가. 어쨌거나 오래 전, ‘디디에’란 이름의 개가 되어 길가던 여자의 엉덩이에 코를 들이댄 바 있는 감독 알랭 샤바는 영화의 재료를 아주 사소한 현실에서 끌어와 양념을 쳤는데, 난장이 따로 없다. 석달 만에 피라미드를 완공해야 하는 대공사에 동원된 노예들이 대규모 파업 군중으로 돌변해 수당, 휴가, 고용 안정을 외치는 장면은 노동권 보장의 나라, 프랑스에서 툭하면 일어나는 파업, 그 필요악에 대한 감독의 애교 섞인 야유였다. 또 여성 파업 선동자의 말이 툭툭 끊기는 장면은, 전세계 휴대폰 통화자라면 ‘친숙한’ 통화 불량 상태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특히 감독 개인적으로 이동통신회사의 부실한 서비스와 폭리에 상당히 불만이 컸던지 이 장면은 서너 차례 등장하고 심지어 “저쪽으로 서봐. 수신상태가 더 나으니” 하는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 버젓이 등장하는 일본인 관광단. 난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들은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명품가에 오밀조밀 열지어 다니는 모습 그대로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현란하게 장식하는 중국 권법. 현재 유럽인들이 극도로 열광하는 이소룡과 성룡에 대한 오마주 내지 할리우드식의 특수효과를 야유하며 즐긴 슬랩스틱코미디다.
그러나 <아스테릭스: 미션 클레오파트라>에 비친 시대성의 단편들이 문화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힘은 확실히 약했다. 우선, 아스테릭스의 정체, 골루아족과 로마인의 고질적인 다툼, 영화 전편 또는 만화인 원작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하품으로 점철된 영화보기가 될 게 뻔하다. 하지만 나와 당신이 늘 부딪치고 한편으로는 투덜거리는 생활의 단편들을 모아 아이러니로 가득 찬 한편의 코미디로 완성한 감독의 안목. 그리고 ‘나도, 너도, 우리 모두 즐거웠으면 해’ 하는 넉살. 상대역으로 출연한 모니카 벨루치와의 애정신을 부득부득 우겨서 애초 예정에 없었던 길고 긴 키스를 성사시킨 것은 감독의 즐거움, 영화를 보며 키들키들 웃을 수 있는 건 나의 즐거움. 내 인생의 영화들은 내 알량한 희로애락의 감정을 떠날 수 없으니, 이제 남은 결론. 어쨌거나 나만 즐거우면 그만. 내 영화보기의 엉성한 원칙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