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단편 Review] <이른 여름,수퍼맨> <노을소리>
2003-05-13
글 : 김소희 (전 씨네21 편집장)
<이른 여름,수퍼맨>

국도를 달리는 시외버스. 엄마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 어린이에게 버스 안의 풍경은 적적하고 밖의 풍경은 단조롭다. 문득 창 밖으로 스쳐가는 빨간 물체. 뭘까? 슈퍼맨이다! 짜리몽땅한 슈퍼맨은 유리창 밖으로 나란히 날며 아이를 위해 즐거운 한순간을 선물한다.

아스팔트 지평선 위에서 달음박질쳐오는 슈퍼맨의 이미지로 시작한 영화는 소풍놀이라도 예고하는 듯한 경쾌하고 단순한 음악과 함께 시외버스 안의 한 여자아이에게 집중한다. 그런데 문득 창 밖으로 무서운 얼굴 하나가 나타난다. 밀짚모자에 흰색 러닝셔츠만 입은 채 자전거를 탄 아저씨의 얼굴은 거무스름한 수염으로 덮여 있기까지 하다. 아이는 놀라 움츠러드는 반면 창쪽으로 시선을 돌린 엄마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시시해하는 얼굴이다. 바로 이 순간은 이후에 펼쳐질 황당한 상상의 출발점이다.

그러고도 영화는 한참 동안 차창 밖 풍경을 나열한다. 산과 하늘색 하늘, 흰구름이 큼지막하게 얹혀 있는, 아이의 그림책에나 나올 법한 풍경화를 비롯해서 때로 멀리 때로는 가까이 거듭 창 밖을 묘사한다. 자칫 성의없는 관광객의 시선처럼 보이는 이같은 이미지의 나열은, 어린아이의 지루함을 정서적으로 공유시키기 위한 축적의 과정이다. 바로 그때 문제의 슈퍼맨이 아이의 눈앞에 나타난다. 자전거 탄 아저씨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외모와 풍채를 지닌 슈퍼맨은 아이를 위해 갖가지 재롱을 부리고, 전봇대에 부딪쳐 낙상하는 괴로움도 마다않는다.

물론 이것은 지루해진 아이가 조작해낸 공상의 세계다. 아이는 농촌의 풍경을 배경으로 영화적이고 만화적이며 심지어 개그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런데 <이른 여름, 수퍼맨>이 단편영화로서 도약하는 것은, 아이가 내린 다음에도 슈퍼맨의 흔적이 버스 안과 밖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데 있다. 단조로운 시공간을 배경으로 아이의 공상을 펼친 뒤 그 공상이 무미건조한 어른의 현실 안으로 스며들어와 상상과 현실간에 약간의 전위가 일어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영화/판타지의 기능에 대한 하나의 우화처럼 보인다.

<노을소리>

청각장애인 어린아이는 엄마가 외출하고 난 뒤 집을 나와 거리로 나선다. 연을 날리는 또래 아이를 부러운 듯 쳐다보던 꼬마는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변에서 사고의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끈 떨어진 연을 발견해서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지만 외면당한다. 노을이 지고 엄마가 돌아온다.

<노을소리>를 관통하는 한 가지 특징은 소리의 몽타주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리있음과 소리없음의 몽타주다. 시점숏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소리가 없는 순간은 대체로 아이의 시점으로 포착된 이미지가 수반된다. 청각장애아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휴머니스틱한 동기가 영화의 형식에도 신선미를 가져온 것이다.

영화는 아이가 감각하는 현실을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빨래를 하는 엄마가 마지막 헹굼질을 끝내고 부은 맑은 물이 수챗구멍으로 내려가는 것을 바라본다거나,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엄마가 준 동전 한닢으로 장난하는 모습 등이 방 안 장면으로 잘 포착되어 있다. 반면 집 밖은 대대적인 개발지역으로 산을 깎아내린 황톳빛 언덕, 골리앗 크레인, 아파트 골조와 불도저 등이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이어서 집을 떠나 내달리는 아이의 모습을 롱숏으로 잡는데, 불안정한 가건물로 가득 찬 동네 풍경을 통해 비로소 엄마의 외출은 아마도 파출부 일을 나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되짚게 된다.

위태롭고 외로운 하루가 저물고 하늘에는 쟁반만한 해가 낮게 걸려 있다. 아이는 길에서 주운 실로폰 채로 해를 톡 건드린다. 그러자 해가 만들어낸 노을소리가 울려퍼진다.

<노을소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가 느끼는 외부세계를, 단편적인 이미지와 구체적인 상황들을 교대시키면서 묘사한다. 아이의 외부를 통해 내면의 느낌에 성공적으로 도달하고 있으며, 가난한 모자 가정이 처해 있는 사회적 환경도 적절한 수위로 드러냈다. 이 모든 것을 대사 한마디 없이 서정적이고 풍부한 이미지를 통해 구축했으며 무엇보다도 노을과 소리라는, 보통의 발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시청각적 조합으로 마무리한 감수성이 인상적이다. 2001년 베니스영화제 단편 경쟁부문 진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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