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와일드’하게 비가 내렸다. 그리고 <와일드카드>의 두 형사들을 기다린다. 먼저 형님이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담배를 물어 피우고는 천천히 걸어다니며 공간을 익힌다. 깡패들에게는 무섭게, 가족에게는 부드럽게, 그렇게 이중의 생활을 오차없이 끌어나가는 형사 오영달의 노련함은 그 느긋한 걸음에도 배어나온다. 그건 배우 정진영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함이다. 방제수 역의 양동근이 들어섰다. 거침없이 자리에 앉는다. 물어보기 전까지는 한마디 말도 없다. 범인을 잡으러온 형사 방제수처럼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시선을 내려꽂는다. 우회하지 않고 숨기지 않는, 그래서 친구와 적이 분명한 양동근, 발로 뛰고 주먹으로 생각하는 돌출적인 형사 방제수 역에 그보다 더 어울리는 적임자를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러가도 같은 영화는 안 볼 것 같고, 음악을 들어도 다른 종류만 들을 것 같은 두 사람. 빼어난 말솜씨로 ‘그것을 알려주는’ 형님과 말보다는 ‘구리뱅뱅’ 랩으로 의견을 뱉어내는 것에 능숙한 동생. 달라도 많이 다를 것 같았던 이 15살 차이 형님 동생은 마치 영화 속 파트너처럼 다정하고, 격의없다.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욕심없음’, ‘가식없음’ 등의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 양동근, “둘 다 나쁘죠”. 정진영, “둘 다 죄악이죠”. 퍽치기가 더 나쁜가, 강간범이 더 나쁜가, 라고 물어보자 낱말의 선택이 다를 뿐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나이차를 무색하게 하는 친밀감은 그렇게 비슷한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낯가리기로 유명한 양동근이 인터뷰 도중 웃음을 띠는 것은 정진영이 말을 건넸을 때이거나, 정진영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뿐이다. “형님은 주먹내세요. 저는 가위낼게요.” 포즈를 취하며 던지는 썰렁한 농담 한마디에도 정진영은 허허 웃으며 시키는 대로 한다. “내가 형 좋아하는 거 알죠?”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형사 방제수의 모습, 허허실실 눙치며 동생을 이끄는 형사 오영달의 모습 그대로이다. 두 사람은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보다 서로를 설명하는 것에 더 능숙하다. 그래서 양동근을 알기 위해서는 정진영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정진영을 알기 위해서는 양동근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 말들은 결코 의례적인 겉치레가 아니다. 정진영이 말한다. “연기 무지하게 잘하고, 에너지를 갖고 있는, 한마디로 뜨거운 청년이죠.” 그만의 진솔한 표현이다. 양동근이 말한다. “정의로우세요. 여러 방면으로, 전체적으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을 꺼낸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진짜라는 얘기다. 비맞으며 들어온 두 형사들, 잠복근무 중에 대화하는 낮은 톤으로 서로를 감싸안았다.
투명한 남자 집요한 연기
정진영은 시나리오를 읽어보기도 전에 영화의 출연을 결정했다. 김유진 감독에 대한 철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김유진 감독에 대해 “<약속>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게 해준” 분이고, “평소에도 지속적으로 뵈며 여러 가지를 많이 배우는, 배울 게 많은 어른”이라고 표현한다. 한마디로 “우리 오야지”라고 부른다. “오야지라는 말이 있잖아요. 일본말이긴 하지만, 그 말 안에는 신뢰와 존경이 있는 거죠”라고 단호하게 밝힌다. 그래서 “형사 얘기다” 한마디만 듣고 “예” 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믿고 따라가면 돼요. 그리고 따라가는 게 옳아요. 또 따라가면 옳게 돼요”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니면 갖기 힘든 생각”이라고 정확하게 덧붙인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와일드카드>는 “비범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 영화의 매력은 그거죠. 어렵다는 내색 안 하는 거, 각을 잡거나 포즈를 취하지 않는 거.”
비범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 오영달을 연기하기 위해 정진영은 절에 들어가 시나리오를 공부했다. 그저 “집중할 장소를 선택”한 것뿐이라고 공치사를 마다하지만, 거기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나는 현장에서 갑자기 드는 생각을 신뢰하지 않아요. 영화라는 게 앞뒤가 다 맞아야 하는 건데 즉흥적으로 하는 건 잘 못 믿겠어요. 그러니까 그 전에 공부하는 수밖에 없죠.” 자신을 가리켜 “현장에서 갑자기 하자면 잘 못하는, 순발력이 떨어지는 배우”라고 낮추어서 표현했지만, 그건 그에게 흠이 되지 않는다. <약속>에서 시작된 배우 정진영에 관한 신뢰도는 점점 더 폭을 넓혀간다. “진정성 있는 영화, 소재와 무관하게 코미디건 뭐건 꼴이 투명한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그는 문제에 부딪히면 해결을 해야 하는 성격이다. 또는 그 전에 지뢰들을 미리 제거한다. 영화의 한 부분에 문제를 제기하자, 사진을 찍고 한참 뒤 다시 다가와서 먼저 말을 꺼낸다. “근데 아까 말한 거 있잖아요….” 그런 집요함이 배우 정진영의 힘이다.
한없이 스트레이트한
양동근은 결코 신발에 발을 맞추지 않는다. 연기에서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다. 한 자리에 있는 낯선 자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아니, 양동근처럼 돌리지 말고 표현하자. ‘기분 정말 더럽다.’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는 상대방에 대한 악의적인 공격에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아니라고 한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위장을 하고, 웃음을 흘린다. 그런데 양동근은 웃음 대신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는 솔직함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터뷰 너무 많이 잡으니까 싫죠.” “할말이 없어서요.” “그런 거 없었는데요.” “그게 무슨 의미냐, 무슨 뜻이냐 돌려서 생각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난처한 대답이지만, 친구가 되어 마주한다면 들을수록 솔직한 말들일 것이다. 그 솔직함은 형사 방제수의 행동처럼 간결하다. 그에게 긴 말은 거짓이다. 그래서 양동근에게 20자 넘는 대답을 얻는 것은 하늘에서 별따는 것처럼 어렵다. “양동근에 대한 편견이 있어요. 아무 생각이 없는 애. 그냥 하는 애. 근데 얘는 묻는 대로만 대답해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물어봐야 돼요.” 정진영이 일러준 힌트.
말하자면 그가 요구하고 지키는 원칙은 솔직함 더하기 정확함 더하기 열정이다. 짧게 표현하지만 정확함을 전제하고, 정확하지만 뜨겁다. 연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동근은 형사 방제수를 “멋있어요”, 한마디로 표현한다. 형사 방제수의 캐릭터를 어떻게 연구했냐고? 이건 코웃음칠 질문이다. “시나리오를 참조했죠.” 그는 분석하지 않는다. 시나리오대로 하면 정확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동물적 본능’ 운운하는 거창한 말을 그는 “그냥, 그저”로 바꿔 말한다. “어떻게 같은 신을 두 가지 기분으로 찍어요. 몰입이요? 배우가 다 몰입하죠. 어떻게 몰입하냐, 그런 거 웃긴 거 아니에요?” 그렇게 양동근은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웃을 때는 천진난만해 보이고, 말할 때는 돌덩이 같지만, 연기할 때는 그 누구와도 견줄 만한 에너지로 넘치는 ‘프로’이다. 텔레비전 시트콤에서 <수취인불명> <해적, 디스코왕 되다> <와일드카드>에 이르기까지 그는 재미없어하며 일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음악과 연기는 “병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 있고 성격이 다른” 것일 뿐이다. 때문에 그 즐거움은 에너지가 되고, 캐릭터가 되어 그의 배우로서의 긴 생명력을 예감하게 한다. 자유의 촉수를 뻗어 연기하는 날것 그대로의 몸짓, 그것이 배우 양동근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