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는 장점이 많고 매력도 많으며 하는 말도 많은 소설이었지만,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고딕 로맨스적 요소였다. 한마디로 렘의 <솔라리스>는 유령 이야기였다.
유령 이야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순수한 공포물로 이런 이야기에서 유령은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다. 다른 하나는 로맨스로 이 이야기에서 유령은 허망한 두 번째 기회이거나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의 상대이다. 이야기에 따라 둘은 종종 중복되지만 그렇다고 이 두 요소의 성격이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솔라리스>로 돌아가보자. 이 소설의 기본 스토리는 무엇인가? 아내를 잃은 심리학자가 아내의 유령과 재회해 다시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다. 기본 유령 이야기와 다른 점은, 이 이야기의 무대가 솔라리스라는 행성의 스테이션 안이고, 아내는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가 남편의 기억에 남은 아내의 상을 이용해 창조한 뉴트리노 유기체라는 것이다.
설정 자체만 해도 로맨틱한 분위기가 철철 흐른다. 주인공 크리스 켈빈에게는 19세기 유럽 고딕소설 주인공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음울한 자괴감과 상실의 고통이 가득 하다. 그의 뉴트리노 유령 아내인 하리는 그녀를 구성하고 있는 입자처럼 허망하면서도 꿈결처럼 아름답다. 실제로 그녀는 말 그대로 켈빈의 꿈이기도 하다.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가 자료로 삼은 건 바로 켈빈의 기억과 욕망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렘은 연애 이야기만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진지한 SF작가였다. 하리의 유령과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는 그에게 사유의 질료였다. 의식있는 외계의 존재와 우리는 어떻게 의사소통할 수 있을까? 만약 그들과 의사소통이 불가하다면 그들의 의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크리스 켈빈과 하리의 로맨스는 그 자체로도 인상적이었지만 좀더 거대한 비전을 제공하기 위한 창문이었다.
로맨스 요소를 최대한 살리다
그러나 여기엔 하나의 소박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로맨스 자체가 훌륭하다면 왜 그것만 집중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되는가? 그렇게 다룬다고 해도 원작의 아이디어에 깃든 철학적 사유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단지 집중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이미 걸작이라는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도 렘의 원작에 그렇게까지 충실한 영화는 아니지 않나?
스티븐 소더버그와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 <솔라리스>는 바로 그 시도를 했다.
보기보다 까다로운 작업이었을 거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겠다. 이건 제작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마케팅의 문제이다. 마케팅 담당자에게 러브스토리와 SF는 섞이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 연애담과 섹스를 첨가할 수 있지만 순수한 러브스토리만으로 SF를 채울 수는 없다. 액션과 특수효과와 같은 ‘남성적’인 것이 추가되어야 한다.
<솔라리스>의 마케팅 담당팀은 좀 바보 같은 짓을 했는데, 그건 장르를 속이는 것이었다. 아니, 장르를 속이는 것 정도는 괜찮다. 하지만 그들은 그걸 아주 서툴게 해치웠다.
<솔라리스>의 멜로드라마 예고편은 바로 그들의 기만의 희생자였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SF적인 비주얼을 제거하고 영화를 로맨스로 분류해 광고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트릭에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예고편은 아주 억지스러운 로맨스영화의 예고편이 돼버렸다. 마치 <총알 탄 사나이 3과 1/3>을 위해 만든 가짜 로맨스 예고편처럼 말이다. 왜 그들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최근 조사 결과에 의하면 여성 SF/판타지팬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몇몇 작품들에서는 남성 팬들의 수를 능가한다. 아마 <버피>에서 여성팬들을 제거한다면 그 시리즈는 처음부터 허물어질 것이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다루어도 문제가 될 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소더버그와 카메론은 <솔라리스>를 어떻게 각색했을까? 그들은 두 가지 접근법을 택했다. 원작에서 로맨스의 요소를 최대한으로 뽑아내고 어떻게든 유명한 타르코프스키 영화와 스타일과 내용면에서 차별화를 주기로 한 것이다. 덤으로 뉴트리노를 힉스장과 힉스입자로 고치는 식의 업그레이드를 하기도 했고.
타르코프스키 영화와의 차별화는 눈에 쉽게 들어온다. 그건 거의 공인된 걸작에 대한 치기 가득한 도전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길고 장황하며 묵직하다. 하지만 소더버그의 영화는 짧고 간결하고 빠르며 상대적으로 가볍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60, 70년대 유럽 멜로드라마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긴다. 그건 쓸쓸하고 정갈한 가을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고(이 영화의 지구에서는 늘 비가 내리고 있다) 연애의 주인공들이, 생각할 거리가 많은 교육받은 어른들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솔라리스>의 러브스토리는 감정보다는 그런 감정을 끌어내는 상황의 독특함에 의지하고 있다. 아무리 순수한 러브스토리를 만들려고 애를 써도 이야기의 성격 자체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바뀐 것은 어느 쪽에 더 중점을 두느냐이다.
원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소더버그/카메론의 <솔라리스> 전체를 지탱하는 것은 로맨스의 불합리한 논리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 둘이 살아 있는 동안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둘 중 하나가 죽으면서 시작된다. 구식 로맨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과 상대방이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다.
죽음은 이 믿음에 심각한 상처를 낸다. 만약 로맨스의 논리가 강요하는 근거를 받아들인다면 논리적인 해결책은 자살이다. 자살로 끝나는 <로미오와 줄리엣>류의 수많은 로맨스 소설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대부분은 그런 논리를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길 만큼 용감하지 않으며 우리가 무시하기엔 삶의 욕망이 너무 강하다. 여기엔 이타성을 위장한 로맨스의 이기성이라는 또 하나의 심각한 아이러니가 끼어든다. 한번 생각해보자. 논리적으로 로맨스의 대상과 일체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SF세계인데 텔레파시가 있지 않느냐고?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무리 기를 써봐야 어쩔 수 없는 타자인 상대방과 접촉하고 이해하고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감각과 이성을 동원하는 것뿐이고, 그 결과 우리가 얻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저장되는 감각적 정보들과 행동 패턴에 대한 기억뿐이다.
복제의 아이디어를 확대 과장
크리스 켈빈은 어정쩡한 생존자다. 그는 아내가 죽었다고 따라죽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의 상실감과 죄의식이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아마 그는 그걸 그대로 잊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식의 고통은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하며 소유하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가 솔라리스에서 아내의 유령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함정이 두개 숨어 있다.
함정 하나. 그가 솔라리스에서 마주친 아내 레아는 진짜 아내가 아니라 아내의 복제물이다(렘의 소설이나 두 영화는 모두 기겁한 켈빈이 첫 번째 아내의 복제물을 우주선으로 쏘아버리는 에피소드를 첨가해 이 복제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만약 레아가 살아 있고 그가 레아의 복제물과 사랑에 빠진다면 그건 불륜일 것이다. 그렇다면 레아가 죽었다고 해서 레아의 복제물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죽은 아내에 대한 배반이 아니라고 할 근거가 있을까?
함정 둘. 이건 진짜 흥미롭다. 레아는 진짜 레아의 복제물이 아니라 켈빈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레아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론상 가짜 레아는 진짜 레아보다 더 진짜같다. 크리스 켈빈은 끝끝내 아내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어느 누구도 타자를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의 기억 속에 남은 레아의 이미지는 그의 갈망과 기억이 뒤섞여 만들어낸 그 자신의 창조물로, 실제 레아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솔라리스의 가짜 레아는 그가 잃고 괴로워하던 대상과 더 가깝다. 솔라리스의 가짜 레아에 대한 켈빈의 사랑은 순수하고 격렬하고 로맨틱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국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위의 두 함정을 번갈아 검토해본다면 로맨틱한 사랑 자체가 자위행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상대방의 절대적인 가치를 주장! 하는 로맨틱한 감정이 극도에 도달할수록 로맨스 자체는 오히려 자기 속에 함몰하고 만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흠….
거의 하드 SF적인 상상으로 이어가는 원작과 러시아풍의 우울함으로 가득한 타르코프스키 영화와 달리 소더버그와 카메론의 <솔라리스>는 별다른 장식없이 이 딜레마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편이다. 원작과 첫 번째 영화와 달리 이들의 <솔라리스>는 복제의 아이디어를 확대 과장하는데, 결과적으로 영화는 사랑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라는 로맨스의 기본 구조에 더 집중하게 된다.
이런 접근법은 결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영화 후반부에서 크리스 켈빈은 지구로 돌아오고 아파트에서 자신이 진짜 자신이 아니라 솔라리스의 방문객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앞에 살아 있는 레아가 나타난다.
이 결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지구로 돌아간 건 켈빈의 복제물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 모든 건 솔라리스에 남은 켈빈의 복제물이 겪는 환상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들 모두가 솔라리스의 바다에서 구축된 환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어느 게 진실이냐가 아니라 그 결말의 내용이다. 어느 게 진실이건 영화는 진정 효과를 가지고 있다. 결국 크리스 켈빈은 그의 아내 레아를 만나고 두 번째 기회를 얻으며 그들의 사랑은 영원하다. 영화가 거의 강요하다시피 인용해대는 딜런 토머스의 <And Death Shall Have No Dominion>의 다음 구절을 한번 들여다볼까? “Though Lovers be lost love shall not.” 어디에선가에서 사랑이 영원하다는데,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필멸의 연인들이 어디 있는지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