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화성으로 간 사나이’와 ‘지구에 남은 여자’라서 그럴까. 신하균과 김희선은 한 공간에서 사진을 찍고 있지만 각자 다른 세계에 발을 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이질성은, 어디가서나 주눅들지 않고 당당한 김희선의 태도와 어떤 여배우들과 동석하든지 사춘기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는 신하균의 수줍은 천성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명색이 ‘멜로영화’를 찍은 커플치고는 조금 의외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특히 어떤 상대배우에게라도 ‘오빠’라는 호칭을 스스럼없이 붙여왔던 김희선이 3살 많은 신하균을 매번 “신하균씨”라고 부르는 모습에서는 ‘그저 즐겁게 작업한 친한 오빠’보다는 ‘배우 대 배우’로서의 묘한 경쟁심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카메라 셔터소리에 맞춰 척척 포즈를 잡아내는 김희선의 뒤편에서 그 모습을 미동없이 바라보는 신하균. 평생 한 여자를 바라만보다 결국 사랑을 얻지 못한 채 스스로를 버려야 했던 남자와, 그 사랑의 깊이와 농도를 미쳐 깨닫지 못하고 뒤늦게 눈물흘려야 했던 무심한 여자의 이야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짧은 만남의 풍경 속에 <화성으로 간 사나이>의 진행과 결말을 어떤 스포일러보다 짙게 누출하고 말았다.
꽃처럼, 풍경처럼,김희선
영화가 한 그루 나무라면 김희선은 그 나무에 핀 꽃이다. 브라운관에서 꽃망울을 틔우고 영화라는 토양으로 고르게 옮겨 심어졌던 그 꽃은 지난 10년 동안 쉬지 않고 강렬한 색으로 피어났고 결국 만리향처럼 아시아 전역에 퍼져나갔다.
개봉을 앞둔 <화성으로 간 사나이>는 말 그대로 김희선이 꽃처럼, 풍경처럼 드리워진 영화다. “원래 짧은 시간에 깊이 빠지고, 금세 잊어버리는 성격” 탓도 있겠지만 그에게선 이미 “김희선이 변했다”는 말로 도배를 했던 <와니와 준하>에서 풍겼던 서늘한 새벽 같은 기운은 사라져버리고 없다. 난생처음 짧게 잘랐던 머리가 다시 풍성한 긴 머리로 자라났듯이 김희선은 또다시 친숙한 발랄함으로, 부러운 당당함으로 우리 앞에 있다.
끊이지 않는 스캔들로 스포츠지 1면을 장식하는 것은 기본이고, 자신을 사칭하며 사인에 목소리까지 똑같이 따라했던 인터넷 열성팬의 등장이나 중국에는 ‘김희선 매니저’라고 명함을 뿌리고 다니는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라는 뉴스를 듣고 있으면 그의 이미지와 인기는 이미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선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 같다. 이런 주체 못할 인기는 가끔 그를 우둔한 스타쯤으로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지만 그는 원대한 청사진 대신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능력 안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야 한다는 욕심과 지혜를 누구보다 잘 활용하는 배우다. “어릴 때부터 스포츠신문이고 언론에 하도 많이 치여서 익숙하다. 하지만 이 생활을 언제까지 더 하고 싶지는 않다”는 착찹한 심정을 털어놓으면서도 연기에서 손을 떼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조만간 <링>의 마쓰시마 나나코가 주연한 일본드라마 <야마토 나데시코>를 리메이크한 SBS 드라마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나이 들어서 연기하고 싶지 않다. 늙어서 연기하는 건 좀 안돼 보인다. 사람들이 그저 젊고 아름다웠을 적의 내 모습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가능하면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그에게 왜 당신의 연기는 10년 전이나 똑같으냐고, 왜 한번도 열매를 품지 못했느냐고 따져 물을 순 없다. 우리는 영화라는 나무에 열린 많은 열매들 덕에 배불렀고, 영양을 채우기도 했지만 꽃 때문에 잠시 행복했던 적도 있었다. 그는 날 때부터 나무가 아니고 꽃이었으며 그 꽃은 때가 되면 져버릴 것이다. 비극은 없다. 그것이 만고불변의 자연의 이치이자, 김희선 스스로가 결정한 자신의 삶의 이치이기도 하다. 그러니 불평을 거두고 즐겨라. 꽃이 지기 전에, 봄이 가기 전에.
사랑은 나의 것,신하균
“예비군 훈련 받으러 가야 한다”며 조금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는 정말 동네 어귀에서 총을 삐딱하게 메고 어슬렁거려도 좋을 ‘예비군 아저씨’ 같았다. <지구를 지켜라!>로 인사를 나눈 것이 한, 두달밖에 안 지났는데도 신하균은 외관상으로 살도 좀 붙었고 머리도 덥수룩 자랐다. 워낙 자신의 상태를 말로 드러내는 성격이 아닌 탓에 “허허” 하는 웃음 속에 속내를 숨기고 있지만 신하균의 눈빛엔 ‘나 요즘 고민하고 있음’이란 사인이 역력하다. “살이 찐 게 아니라 부은 거예요…”라며 부정하는 얼굴선의 변화나 요사이 부쩍 늘었다는 술, 담배 소비량도 그의 상태를 짐작게 하는 단서가 된다.
<화성으로 간 사나이>를 끝낸 신하균은 <공동경비구역 JSA>을 끝낸 신하균과 다르다. ‘어디서 저런 배우가 숨어 있었어’ 하는 찬탄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던 <…JSA>를 지나 그는 쉬지 않고 우리를 놀라게 했다. 대사 한마디 없이 끊어오르는 분노를 전달했던 <복수는 나의 것>의 청각장애인 류나 처음엔 ‘미친놈’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를 믿게 만들었던 <지구를 지켜라!>의 ‘집념의 사나이’ 병구 같은 역할을 거쳐오며 배우 신하균에게 바라는 관객의 기대치도, 스스로의 달성목표도 조금씩조금씩 상향조정되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추억들을 되새김하는 것이 좋았던 탓에 출연을 결정했다”는 <화성으로 간 사나이>는 어떤 면에서 의외의 선택이었다. 포지션의 <아이 러브 유> 뮤직비디오에서 바보처럼 순수하던 신하균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던 관객이라면 승재의 애절한 순정과 아련한 눈빛에 눈시울을 적실지도 모르지만. “강하고 센 영화가 취향”이라는 그에게 <화성…> 같은 ‘청정멜로’는 어딜 봐도 ‘농도 조절’을 위한 영화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그 사이 <서프라이즈> 같은 심심한 멜로를 선택함으로써 정말 관객을 ‘서프라이즈’하게 만들었던 전과도 있었지만). “멜로에 초점을 맞추었다기보다는 그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그런 걸 그리고 싶었어요. 만약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 다면 제가 부족한 탓이겠죠….”
비디오까지 나온 상태에도 여전히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지구를 지켜라!>팀의 백윤식은 얼마 전 그에게 한마디 충고를 던졌다. “열심히 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그리고 그 말은 꽤 강렬하게 그의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외치던 남자, 물파스 하나를 손에 쥐고 지구를 지키던, 그러다 갑자기 화성으로 떠났던 사나이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그의 다음 행보가 이토록 궁금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아마 그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