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엑스맨2>에 감춰진 종교성과 세속성
2003-05-26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어떻게 하면 무서운 공포영화 괴물을 만들 수 있을까? 만약 여러분이 흉물스러운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공포의 핵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여기서 한 가지 패턴을 그려줄 수 있다. 괴물이 우리와 가까워질수록 공포와 혐오의 정도는 더 커진다.

자,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 만약 괴물이 식인 상어이거나 지하 세계에서 올라온 벌레 괴물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물론 잡아먹힐까봐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대응방법을 선택하기는 어렵지 않다. 요란한 폭발 소리와 함께 그들을 때려잡으면 된다. 그게 어렵다면 주인공에게 그 임무를 맡기고 우린 조용히 달아나면 되고. 우리는 우리이고 그들은 그들이다.

외계에서 온 콩깍지 외계인은 그보다 조금 더 무섭다. 그들은 우리도 아니면서 우리인 척하는 사기꾼들이다. 우린 여기서부터 망설여진다. 우리가 몇십년 동안 살을 비비며 같이 살아온 남편/아내가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의 세계는 무너진다. 우리가 바깥 세계 사람들과 맻고 있는 연관성 역시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그들을 위장한 타자들과 교체된다면 그건 우리의 생살을 찢고 그 안에 플라스틱 통을 쑤셔넣는 것이나 다름없다.

교체되는 것이 우리의 자식들이라면 어떨까? 우리의 자손들은 따지고보면 우리의 이웃이나 친구들보다 더 치명적이다. 그들은 우리가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우리의 일부로서 존재해야 하는 우리 살덩이의 일부이다(후손들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을 이타적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여기 있다). 그런 그들이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로 변형되고 오염된다면? 나는 종종 조선시대의 사대부 양반이 21세기의 서울 시내에 떨어져 바뀐 세상을 구경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아마 그들에게 서울 시내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일 것이다. 그들의 세계는 그들의 후손들을 자처하는 존재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자신이 낳은 자식들이 자신을 전혀 닮지 않은 다른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건 인간들의 오랜 공포 중 하나였다. 당연히 이런 감정은 공포물의 소재가 된다. <저주받은 도시>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 영화화된 존 윈덤의 <미드위치 뻐꾸기>가 대표적인 예. 이 책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아이들은 따지고보면 부모 말 안 듣고, 자기만의 가치와 행보를 모색하는 모든 젊은이들의 상징인 셈이다.

서구사회에서 이런 공포증은 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부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반항적인 젊은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많지 않았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세계는 갑자기 엄청난 일탈을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제 사람들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종류의 시스템, 다른 인종인 배우자, 다른 취향의 문화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까지 용납되지 않았던 성적 취향까지.

다른 성적 취향, 문화적 취향에 대한 이물감

<엑스맨>의 설정은 사실 진화론적으로 엉터리다. 돌연변이는 분명 진화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하지만 특정한 임계점에 도달하는 바로 그 순간 온갖 초능력을 가진 신인류 돌연변이들이 우르르 튀어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진화는 그럴 만한 방향성도 없고 성공률도 낮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우르르 돌연변이들이 나왔다고 해도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라는 법도 없다. 미스틱과 매그니토가 섹스를 한다고 해도 둘 사이에 제대로 된 애가 나올 수가 있을까? 내가 보기엔 그건 코끼리와 코뿔소 사이에서 잡종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처럼 허망한 일 같다.

하지만 <엑스맨>의 돌연변이들은 과학적 예언이라기보다는 컬러풀한 은유이다. 많은 영향력 있는 SF들이 그렇듯 <엑스맨> 우주가 묘사한 건 미래가 아니라 현재였다. 만화책의 돌연변이들은 언제나 존재해왔지만 갑자기 사방에서 튀어나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기 시작한 다른 인종, 다른 성적 취향, 다른 문화적 취향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상징이었다. 선악의 대결이 비교적 모호했던 것도 이해할 만하다. 이들을 가르는 건 옳고 그름이 아니라 방법론의 차이였다.

첫 번째 <엑스맨>은 두 방법론의 대결이었다. 사비에 교수는 평범한 인간들과의 공존을 꿈꾸고 매그니토는 전혀 다른 두종의 평화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매그니토의 해결책은 그 차이를 강제적으로 없애는 것이고 여기서 두 세력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영화는 당연히 이그재비어 교수의 방법을 지지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에게는 분명한 해결책이 없다. 매그니토의 방법이 제지되어야 하는 진짜 이유는 순전히 그의 방법에 기술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개봉된 두 번째 <엑스맨>에서 갈등은 더 복잡해졌다. 첫 번째 영화에서 인간들은 박해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마지막에 주인공들에 의해 구출되는 일종의 배경이자 도구였다. 그나마 드러나는 잠재적 박해자는 로버트 켈리 상원의원이지만 그 역시 위협적인 존재보다는 ‘개심’하고 죽어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두 번째 영화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위협은 구체적이고 사나운 얼굴을 가지게 된다. 브라이언 콕스가 연기하는 군과학자 스트라이커 장군이 바로 그 사람이다.

스트라이커 장군이라는 인물에서 주목할 첫 번째 점은, 그의 행동이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돌연변이들은 단순히 위협적인 타자 이상이다. 그들은 이미 그의 앞마당을 지나 집안까지 침입해왔다. 그의 아들 제이슨 역시 돌연변이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아들 때문에 자살했고 그는 전세계 돌연변이들에게 전멸시키려고 한다(나보고 묻는다면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겠다. 돌연변이들이 <엑스맨> 우주에서처럼 이유도 없이 마구 튀어나온다면 한 세대를 멸종시킨다고 다른 돌연변이들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담?).

두 번째 흥미로운 점은 스트라이커 장군의 묘사에 삽입된 아주 구체적인 은유이다. 원래 <엑스맨> 이야기가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대한 것이지만 스트라이커부터는 아주 자명하다. 그는 동성애 혐오자다. 스트라이커와 제이슨의 갈등은 극단적인 극우주의자 아버지와 동성애자 아들의 갈등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나 다름없다. 명칭만 돌연변이로 바꾸고 약간의 환상적인 요소를 추가했을 뿐이다. 이그재비어 교수와 스트라이커의 갈등도 마찬가지. 이그재비어 교수는 제이슨이 돌연변이로 태어난 것이고 그걸 인정하는 것이 그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트라이커에겐 돌연변이로 태어난 것 자체가 죄악이다(이 사람, 과학자가 맞는가?). 이들은 재교육이 가능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 ‘재교육’에 의해 정신이 나간 제이슨은 마치 ‘재활치료’를 받은 동성애자 희생자를 보는 것 같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따가운 시선

영화에는 스트라이커 장군의 이야기보다 더 노골적인 장면들도 있다. 아마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아이스맨이 가족들과 재회하는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동성애자의 커밍아웃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스트라이커 장군의 이야기처럼, 여기에서도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다. 물론 여러분은 다른 이유로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할 수 있다. 여러분은 비밀리에 음악 수업을 받을 수도 있고 신분이나 계층, 인종이 다른 누군가와 데이트를 할 수도 있으며, 남몰래 질병을 앓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대상을 넓히려 해도 아이스맨의 어머니가 내지르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그 시도를 막아버린다. “너, 돌연변이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은 해봤니?”

새 캐릭터 나이트크롤러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그의 캐릭터를 장식하는 아이러니를 한번 주목해보길 바란다. 그는 악마와 같은 외모 때문에 박해받는 돌연변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경건한 크리스천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나이트크롤러는 성적취향 때문에 교회 밖으로 밀려난 동성애자들에 대한 흥미로운 은유가 된다. 물론 스트라이커 장군식 논리에 따르면 돌연변이가 된 것 자체가 죄악이니까 교회가 그 ‘죄’를 벗어던지고 들어오라고 강요한다면 나이트크롤러에겐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 자길 린치하지 않는 다른 교회를 찾아나서는 수밖에.

<엑스맨> 시리즈는 점점 종교에 대한 이야기로 변해간다. 의도적으로 종교를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설정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잡아 끄는 것이다. 과거에서부터 내려온 불변의 믿음을 지지하건 새 믿음을 옹호하건, 종교란 타협이 불가능한 패러다임이다. 돌연변이 혐오자인 스트라이커나 극단적인 돌연변이 옹호자인 마그니토가 벌이는 전쟁은 모두 성전이다. 우리 세계에서도 수천 수억의 인류를 몰살하려는 극단적인 행동을 지지하는 것은 대부분 성스러운 목표들이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거창한 비전에 넘어가지 않으며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혐오의 감정도 품지 않는다. 종종 그런 혐오의 감정이 올라 올 때 우린 종교나 다른 ‘위대한’ 사상을 빌린다. 최근 하리수 팬페이지에 비방글을 올렸다가 체포된 남자도 ‘기독교인’을 아이디로 쓰지 않았던가?

온갖 수상쩍은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여전히 이그재비어 교수를 지지하게 되는 건 그가 기본적으로 세속적인 남자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세속성 때문에 그는 공존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며 작은 사람들의 평범한 가치에 대해 안다. 따지고보면 니체가 발명한 거창한 이름을 가슴에 떡 붙이고 홀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슈퍼맨>과 달리, 처음부터 다양한 능력을 가진 자잘한 돌연변이들이 혼란 속에서 날뛰는 <엑스맨>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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