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추억과 미래가 뒤섞인 시간의 주름,<밀레니엄 맘보>
2003-05-27
글 : 정승훈 (영화평론가)
■ Story

비키(서기)는 하오하오(투안춘하오)와 고등학교도 못 마친 채 동거 중이다. 나이트클럽 호스티스인 비키에게 알짜배기 백수 하오하오가 베푸는 사랑이라곤 의심과 질투뿐. 그를 떠나려 해도 그의 애원은 늘 비키의 발목을 붙잡는다. 우연히 만난 일본 형제를 따라 홋카이도의 유바리에도 갔다오지만 상황은 변함없다. 클럽 손님이었던 야쿠자 중간 보스 잭(잭 카오)은 이런 그녀를 사려 깊게 포용해준다. 하지만 하오하오의 집착도 만만치 않고, 잭은 조직사건에 말려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비키는 잭의 메시지만 좇아 일본으로 건너간다.

■ Review

허우샤오시엔의 대표작 <비정성시>에는 “이토록 찬란한 청춘이 사라지면 어쩌나” 하고 자살했다는 메이지 시대 어느 젊은이의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찬란함의 쇠락을 못 견뎌 아예 생을 반납해버리는 낭만이 통용되던 시절은 오히려 아름다웠을지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뭘 하려 해도 안 되던 20대를 “가장 한심하고 가장 찬란했던” 시절로 회고한다. 젊음이 찬란한 이유는 그만큼 바보 같기 때문이다. 여기 <밀레니엄 맘보>는 찬란하고 싶어도 찬란하지 못한 청춘의 무력함에 훨씬 더 밀착한다.

내세울 것 없는 스무살의 당신에게 능력없는 애인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청춘을 빨아먹는다고 상상해보자. 생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자살도 낭만적이지 못한 이 시대에 젊음은 비루하고 현실은 막막하며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리고 이 점에서 <밀레니엄 맘보>는 구체적인 경험을 넘어 20대 초반의 갑갑한 공기 자체를 호흡하게 한다. 그건 당신이 맡고 있거나 맡아봤던 냄새이다. 마치 비키가 현재를 보여주면서 과거의 일처럼 추억하듯.

90년대 내내 대만의 근대사를 서정적 서사시로 들추어낸 허우샤오시엔은 자신의 작업에 아무 관심도 없이 90년대를 거쳐왔을 아들 세대에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대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상에 대한 태도에는 여전히 인내심 강한 휴머니스트의 현실적 성찰이라는 지문이 꾹 찍혀 있다. 감독은 섣부른 청춘예찬보다 지금 여기의 청춘이 왜 예찬될 수 없는지를 되새김한다. 이를테면 “우린 다른 세계에 있다”고 치기를 뽐내는 하오하오는 사실 의처증 환자이자 “맞고 싶어?”라며 손을 드는 전근대적 가부장일 뿐이다. 생계보다 마약을 더 챙기는 이 샛노란 가부장은 병역회피를 위해 각성제를 복용하듯, 현실과 맞설 힘도 의지도 없다. 비키는 한때의 일탈로 너무 빨리 차린 살림이 버겁거니와 섹스 빼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애인의 소유욕에 질려하면서도 뛰쳐나갈 곳이 없다. 둘이 서로 마약과 지갑을 낚아채며 다투는 장면은 스무살도 안 된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유치하고도 처절한 ‘청춘의 덫’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허우샤오시엔답지 않은 음악과 촬영은 그저 감각적 현란함에 그치지 않는다. 비키가 미소를 흘기며 터널을 걸어가는 오프닝은 테크노에 실려 형언하기 힘든 매혹을 발산하지만, 주술처럼 비키를 휘감는 하오하오의 테크노 디제잉은 출구 막힌 권태의 반복으로 느껴진다. 테크노의 무한 루프는 미래없는 젊음의 자폐적 방황을 몽환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들려준다. 즉흥연출에 따라 인물에 바짝 다가가는 카메라도 이중성을 띤다. 술집과 나이트에서는 현장감을 되살리지만, 벽과 문들로 분할된 채 미디엄숏으로만 잡히는 좁은 실내는 폐쇄성이 강화된다. 비키가 귀가할 때 의도적으로 단축되는 초점 거리는 그녀가 보고 싶어하지 않는 구질구질한 현실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스타일은 인물과 공간의 내면 자체이다.

비키가 미소를 흘기며 터널을 걸어가는 오프닝은 테크노에 실려 형언하기 힘든 매혹을 발산하지만, 주술처럼 비키를 휘감는 하오하오의 테크노 디제잉은 출구막힌 권태의 반복으로 느껴진다. 테크노의 무한 루프는 미래없는 젊음의 자폐적 방황을 몽환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들려준다.

비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고향인 길릉(과거)도 하오하오(현재)도 돌아갈 곳이 아닌 그녀에게 영화제의 마을 유바리는 마음의 고향(추억)이다. 또한 과거의 영화들이 추억으로 소생하는 그곳은 영화 간판을 보며 일본어를 익히는 비키에겐 새 출발을 더듬는 공간(미래)이기도 하다. 그 미래는 한 남자를 버리고 한 남자를 잃은 뒤에야, 그 과정을 10년 전의 일로 회상하는 내레이션 속에서야 간신히 엿보일 뿐이다. 하지만 요즘 세대는 “생로병사의 사이클이 빠르다”는 감독의 말처럼, 비키는 겨우 열아홉에 한 삶을 접었다 다시 펼쳐야 했다. 추억과 미래가 정처없는 현재 속에 뒤섞인 그 시간의 주름은 <밀레니엄 맘보>에서 마치 ‘맘보’의 한자표기인 ‘曼波’의 훈독(길게 끄는, 아름다운 주름 혹은 물결)처럼 재현된다. 허우샤오시엔은 새 천년을 맞아도 세기말 같은 젊음의 한 문턱을 그렇게 느릿느릿 응시하며 애정을 갖고 넘어서도록 이끈다. 감독과 첫 대면하는 관객이라면 인내력도 필요하겠지만, 전작들에 비해 심플하고 스피디한 <밀레니엄 맘보>는 결국 이 시대의 모든 청춘에게 말을 거는 영화이다. 비키마저 화면을 빠져나간 텅 빈 유바리 거리는 3인칭 과거로서의 관객 자신의 추억을 소환하려들 것이다.

:: 허우샤오시엔 vs 왕가위

가장 늦게 가는 감독, 가장 빨리 가는 감독

최근 특별전을 통해 뒤늦게 제대로 소개된 허우샤오시엔은 줄곧 영화교과서에서나 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만 뉴웨이브를 이끌었지만 그의 타협없는 작가주의는 그만큼 상업적 보상과 거리가 멀었다. 고정된 롱숏 롱테이크로 기억과 역사를 탐구하는 그의 미학에 대해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다른 방법이 없다. 저 영화들의 마음이 내 마음에 공명을 일으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밀레니엄 맘보>는 90년대 연작과 달리, ‘현대를 위한 3부작’의 첫 작품이다. 그러나 변신이 단절적이진 않다. 폐쇄회로에 갇힌 비키의 거듭되는 방황의 길가기는 <비정성시> <희몽인생> <호남호녀> <남국재견>에서 역사적 굴곡과 정체성 탐색의 모티브로 집요하게 되풀이되었다. 전작인 <해상화>는 매우 낯선 시도였지만 <밀레니엄 맘보>와 비교되는 면이 많다. 19세기 말 상하이의 고급 유곽과 2001년 타이베이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당대의 엘리트 남성과 현대의 젊은 여성은 아편과 마약, 몽환적인 현악과 테크노에 둘러싸인 현실을 맴돈다.

왕가위의 <중경삼림>은 <밀레니엄 맘보>와 도표를 만들어 견줄 만하다. 홍콩/대만, 캘리포니아/유바리, 얼터너티브/테크노, 1인칭 현재/3인칭 과거, 스텝프린팅/롱테이크…. <밀레니엄 맘보>도 중국산을 천시하고 미국을 동경하는 풍속도를 비추지만, 비키는 일본을 향한다. 대만의 식민모국이었던, 그러나 비키에겐 그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일본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공간인 셈이다. 이 현실성의 응시는 왕가위의 트랜디한 감각이 그리는 낭만성 대신 늘 불안과 권태가 공존하는 사실적 젊음을 관찰한다. 왕가위는 허우샤오시엔에 대해 “그의 영화를 보면 자기 삶을 돌아보게 된다”고 말한다. 허우샤오시엔은 답하길, “왕가위는 지금 가장 빨리 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가장 늦게 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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