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을 둘러싼, 예상 가능한 험구와 상찬을 생각해보자. 먼저 예측할 수 있는 비아냥. “헤인즈씨, 어쩌자고 이런 영화를 만드는 거요, 당신은 포스트모던 문화이론 더하기 퀴어이론에 혈안이 되어 있는 버클리대학의 대학원생을 위해 영화를 만들겠다는 겁니까. 당신의 영화는 왜 그토록 사변적 취미에 벗어나지 못하는 거요. 당신은 왜 해묵은 영화의 자기반영성 내에서 영화깨나 봤다는 관객을 위한 비평적인 잡담을 즐기는 거요. 결국 당신은 자신의 호사 취미를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겁니다. 제길.”
그리고 또한 기대할 수 있는 입 발린 찬사. “헤인즈씨, 역시 당신은 천재입니다. 당신은 멜로드라마의 정치학을 완전히 깨닫고 있어요. 게다가 당신은 그것이 퀴어미학의 요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맙소사 당신은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군요. 당신이 더글러스 서크의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과 <슬픔은 그대 가슴에>를 인용하며 개작하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파스빈더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만들었듯이 그리고 그가 <케렐>을 만들었듯이, 당신이 더글러스 서크와 함께했어야 했습니다. 단 당신에게 장 주네는, <케렐>의 장 주네가 아니라 <사랑의 찬가>의 장 주네란 점이 다르지만요. 아, 당신의 <포이즌>을 다시 보고 싶군요.”
뉴퀴어시네마의 불경함을 잃어버리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뉴퀴어시네마의 창립자, 진정한 적자인 토드 헤인즈에 대한 기억을 경유하며, 그의 <파 프롬 헤븐>을 읽고 싶은 유혹에 갇혀버리기 쉽다. <파 프롬 헤븐>은 그런 점에 비춰볼 때 토드 헤인즈의 결정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작품은 뉴퀴어시네마의 불경함을 잃어버린 채 영화의 역사 내에서 배회하며 퀴어미학의 자기동일성에만 골몰하는 작품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토드 헤인즈는 퀴어미학이라는 전통을 구성하고 서술하는 저자로 정착해버렸다. 물론 토드 헤인즈는 뉴퀴어시네마가 발견하고 제출한 도발적인 물음을 대표한다. 그 물음이란 이런 것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인 정체성의 언어를 제공받지 못했을 때 비사회적인 도착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영화의 화면 속에 각인했으며 또한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의 삶의 유사성을 정의하고 확인하는 징후들을 발견하였는가.
이를테면 <벨벳 골드마인>을 생각해보자. 토드 헤인즈는 섭리에 어긋나고 도덕에 벗어난 도착자들의 삶을 일종의 삶의 꾸밈, 삶의 스타일, 즉 삶을 하나의 심미적 작품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윤리적 규정의 지배로부터 동성애 정체성을 해방시킨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한다. 더불어 여기에 글램 록이라는 역사적인 사태를 연결한다. 의학자들이 그들의 몸을 섭렵하고 정신분석학자들이 그들의 심리적 기질을 조회하고 추적하며 그들의 타자성을 실증적인 지식의 대상으로 한정할 때, 변태들은 병상과 분석가의 소파에 누워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찬미하였으며 자신의 이질성을 만끽하였다. 이처럼 토드 헤인즈는 역사적 텍스트와 미학적 텍스트를 교직하며 그에 대한 자신의 비평을 추가한다.
이러한 물음은 영화의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외상을 남기게 되었다. 뉴퀴어시네마의 위력은 바로 이 점에 있었다. 만일 우리 시대의 레즈비언, 게이들의 삶을 묘사하고 그들의 주어진 욕망과 조우하는 영화로 머물었다면, 뉴퀴어시네마는 레즈비언, 게이영화의 연대기 속 시대구분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뉴퀴어시네마는 영화 내부로부터의 폭력이었다. 그것은 영화의 역사에 레즈비언, 게이영화 몇편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영화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폭력이었으며, 영화의 역사는 그로 인한 외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게 되었다. 이때 말하는 영화의 역사란 레즈비언, 게이의 정체성을 영화는 어떻게 검열하고 단속하였는가란 뜻에서의 역사도 아니고 이들을 어떻게 부정적으로 재현하였는가란 뜻에서의 역사도 아니다. 영화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영화란 무엇인가를 묻는 물음의 한 가지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퀴어시네마는 레즈비언과 게이가 등장하는 영화를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화 자체를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물음에서 토드 헤인즈는 그 물음의 도발성이 시효를 상실해버린 시점에서도 여전히 그에 머물러 있으려 하고 있다. 그때 결국 그의 몸짓은 불경함을 잃고 고문서학자의 고답적인 태도로 전환돼버린다. <파 프롬 헤븐>은 바로 그런 그의 위태로운 모습을 증좌한다.
<파 프롬 헤븐>은 더글러스 서크식의 멜로드라마에 대한 메타영화이다. 물론 플롯은 평범한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그것이고, 우리는 그 플롯에서 영웅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관철하려고 하는 비극적인 여자주인공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 순전한 사랑의 욕망을 가로막는 장벽은 계급적인, 인종적인 편견이며 허위에 가득한 부르주아 상층 계급의 규범 따위이다. 그러나 더글러스 서크식의 멜로드라마에서 이런 편견과 규범은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사회적 압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우리는 또 한편의 지극히 진부한 교훈극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금기와 도덕에 가로막힌 숭고한 사랑 이야기는 그리 새로울 것도 없고 또한 대단한 감동을 줄 수도 없다. 그러나 <파 프롬 헤븐>은 바로 이런 평범한 멜로드라마로부터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를 구분시켜주는 차이를 드러내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더글러스 서크의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과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의 차이란 바로 정신병적인 주체로서의 사랑하는 여성이다. 사랑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이를 관철하려 몸부림치는 여자주인공은 정신병적인 주체이다. 만일 그녀가 인습과 규범에 대한 학습된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런 지식을 무기삼아 세상과 맞서 싸우려 했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한 채, 평범한 로맨스를 본 채 극장을 빠져나올 것이다. 알다시피 계급적 장벽은 인종적 장벽으로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장벽으로도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장벽이 사회적 규범을 통해 확립되고 평범한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그다지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핵심은 사랑의 장애물이 아니다. 사회의 법이 단념을 요구한 사랑이 문제였다면 우리는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를 특별히 여길 이유가 없다.
현란한 미장센, 엉뚱한 서스펜스 유발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과 <파 프롬 헤븐>은 불법적 욕망을 꿈꾸었으나 결국 세상의 장벽을 깨닫고 난 뒤 이별해야 하는 로맨스의 커플을 다루지 않는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듯이 ‘캐시’는 현명한 여자가 아니다. 도덕과 법이라는 상징적 지식의 자리에서 그녀를 바라볼 때 ‘캐시’는 미친 여자이다. 그녀는 백인 부르주아 계급의 주부로서 그녀에게 배당된 상징적 정체성이 그녀의 발 아래에서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사랑의 광기에 빠져든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를 전혀 광기에 감염된 여자로 보지 않는다. 그녀는 더없이 숭고하고 우아하며 진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거리 속에 놓인 여자주인공이 등장하게 될 때 멜로드라마는 그로테스크한 비극이 되어버린다. 광적인 사랑에 빠져 있는 여자에게,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사랑의 진실을 제 혼자 수호하는 여자에게, 우리는 더없는 연민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리고 게이 관객은 그 아이러니 속에서 쾌락을 찾았다. 그들은 상징적 법의 금지와 열정적인 사랑 사이에 놓인 기괴한 거리가 응축하고 있는 멜랑콜리를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로부터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파 프롬 헤븐>은 이 점에서 아슬아슬한 도박을 벌인다. 토드 헤인즈는 그 기괴한 거리를 영화 속에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로 맘먹은 것이다. 그는 바로 그 타락한 그러나 숭고한 욕망을 영화를 조직하는 표면적 언어로 표시하려 한다. 결코 귀부인처럼 보일 수 없는 심지어 천박하게 보일 수도 있을 줄리언 무어가 ‘캐시’ 역을 맡은데다, 토드 헤인즈는 심지어 그녀에게 가발 씌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반복적으로 클로즈업되는 친절하고 예의바른 그녀의 미소는 붉게 채색된 립스틱에 의해 인공물처럼 보인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크리놀린 스커트를 입은 채 회전하며 남편의 곁에 앉거나 팔짱을 낀 채 아이에게 훈계하는 그녀의 모습은 더욱더 기괴해 보인다. 시종일관 평정을 잃지 않은 채 우아하고 세련되게 발음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몸속에 녹음된 목소리 칩이 달린 인형처럼 그녀의 몸으로부터 울려퍼지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그 목소리와 포개지는 우아한 관현악의 사운드트랙은 그 느낌을 더욱 고조시킨다.
이런 기괴함은 아무런 컷이 없이 디졸브를 통해서만 연결되는 숏 사이의 관계에 의해 한결 강화된다. 화면은 병적일 정도의 장식으로 가득 찬 미장센에서 인물의 클로즈업으로(대개 ‘캐시’의 얼굴) 혹은 클로즈업에서 미장센으로 디졸브된다. 테크니컬러의 풍부한 색감을 재현하고 화면을 회화적이며 빽빽한 미장센으로 조직하는 것은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을 참조하고 있음을 가리킬 뿐이다. 토드 헤인즈는 <파 프롬 헤븐>을 통해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의 미니멀리스트적인 개작을 시도한다. 그는 내러티브를 조직하는 행위로서의 연기를 가능한 억제한다. 그 대신 드라마의 핵심을 이루는 견디기 어려운 심리적 긴장을 인물들의 포즈, 스냅숏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이런 잔꾀는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심리적 긴장을 조직하는 미장센의 장면들은 불편한 서스펜스로 채워진 장면으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예를 들어 레이몬드와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그녀의 포즈라든가 이혼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깊은 밤 남편으로부터 전화를 받을 때 프랭크를 보여주는 이동숏 따위는 엉뚱한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결국 토드 헤인즈는 최소한의 연기와 현란한 미장센과 강박적인 편집으로 50년대 멜로드라마의 핵심을 상징화하려던 그의 야심찬 기획을 실패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그것은 이미 예정된 실패였는지도 모른다. 광적인 사랑과 그 안에 깃든 무조건적인 윤리적 슬픔의 아이러니와 비극적인 그로테스크함을 그는 화면 속에서 드러내고자 무모한 용기를 발휘했다. 그는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에 존재하는 그 재현될 수 없는 ‘너머’로부터의 쾌락을 영화의 언어로 가시화시키고, 그를 통해 자신의 퀴어미학의 적자로서의 자리를 확인받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미학적 정통성에 너무 마음을 빼앗겼다. 그 대가는 잔인한 것이었고, 그것은 바로 그 도착적인 욕망의 숭고함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주 간단한 문제를 잊어버렸다. 그는 멜로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그 드라마가 어떻게 하면 기괴한 불안과 숭고한 슬픔을 안겨주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그토록 퀴어 관객을 사로잡았는지 잊어버렸다. 결국 많은 이들이 <파 프롬 헤븐>을 보고 난 뒤 그 영화를 습관처럼 그저 “우아한 영화”로 기억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의 열광적인 팬에게 이보다 더 참담하고 분한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