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이발소의 이발사 ‘아무개씨’를 마을 사람들은 그저 이발소를 운영한다고 해서 농담 삼아 ‘이씨’라고 부른다. 그는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잘 안 피우는 성실한 사람이다. 어느 날 이발소 이씨는 오해에 휘말려 구멍가게 구씨와 심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제목에 쓰인 다를 ‘이’(異)자가 보여주듯 <이발사 異氏>는 성(姓)씨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성(性)별에 관한 영화이다. 남자들만의 공간으로 대표되는 이발소. 푹푹 찌는 한여름 동네 남자들은 그곳을 휴게소 삼아 찾아와 웃통을 벗어젖히고 짓궂은 농담과 음담을 늘어놓는다. 마을 남자들이 눈치보지 않고 입 안의 찌꺼기를 뱉어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그곳이다. 그러나 그곳의 주인 ‘이씨’는 아무리 더워도 먼지 들어올까 문도 안 열 만큼 깔끔하고, 구멍가게 구씨의 말대로라면 “마누라나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만을 즐겨 듣고, 말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농담에 끼어들 생각도 안 하며, 걸쭉한 음담 한 자락 펼치지도 않는다. 그 공간의 주인이지만, 이씨는 언제나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편해 보인다. 이발사 ‘이씨’에게 이곳은 삶의 터전이지만, 성이 다른 이(異)씨에게 이곳은 매사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이발소 異氏>의 권종관 감독은 그런 이씨에게 어떤 전복의 행위를 요구하거나, 이발소 자체의 존폐 내지는 전복을 거론하지 않는다. 동네 젊은 부인의 몸매에 촌평 한마디 붙였다가 망신을 당한 구씨가 이씨에게 그 화를 돌리고, 따지고 덤비는 구씨의 말 속에 섞여 튀어나온 “계집애”라는 말에 이씨가 발끈하면서 소동이 일어나지만 이내 감정은 누그러진다. <이발소 異氏>는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다소곳한 화해도 역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다른’ 성에 대한 질문으로 들어서서 ‘같은’ 커뮤니티를 바탕으로 한 화해로 마무리된다. 2000년작 <이발소 異氏>는 그동안 많은 영화제들에서 선보여 그 갈등과 화해의 조율을 인정받은 바 있다.
<아버지의 노래를 들었네>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고 있는 어린 인영은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영의 아버지는 도시에 살고 있다. 할머니는 손자 인영을 데리고 도시로 아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를 피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채 돌아온다.
<아버지의 노래를 들었네>는 영화적인 ‘화술’의 문제를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작품이다. 1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영화 속 장면들은 때로는 적확한 이유로 때로는 무리한 이유로 혼선을 유도한다. 영화는 의식적으로 불친절하게 구성되어 있고 때문에 때로 산만하기 짝이 없다. 마주치지는 못하지만, 희미하게는 들려오는 아버지의 존재감, 어린 인영 자신이 처한 그 관계의 어지럼증을 담아내기 위해 영화는 혼선의 형식을 조용하게 밀고 나간다. <아버지의 노래를 들었네>는 무언가에서 자유로운 척하기보다 정말 모를 일이라고 읊조리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인영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친절한 안내판이 아니라 따라가다 보면 같이 길을 잃게 되는 고장난 나침반의 역할을 하게 된다.
들려오는 인영의 목소리는 이미 어른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 있는 인영은 아직 어린아이다. 그래서 인영이 ‘들려주는’ 사실들은 시간상 이미 벌어졌을 결과들과는 상관없이 무지함에 갇혀 있다. 인영은 과거를 진술하는 자이면서도 현재까지 모르는 것이 많은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사운드의 주체와 이미지의 주체를 한 인물 안에서 분리함으로써 영화는 쉽게 시간을 재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갈등의 주된 원인이 되었던 아버지의 성 정체성(아버지가 부르는 노래는 아바의 ‘댄싱퀸’이다!)이 뒷전으로 밀리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일상’의 테제가 병마처럼 지배적인 한국 단편 영화계의 흐름에 이지선 감독은 섬세한 감성을 실험적인 영화의 형식으로 전화하는 좋은 예를 선보이고 있다. 2002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