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근성만 남은 형사 장도준(김석훈)이 테러리스트 강기택(박상민)의 뒤를 쫓고 있다. 전직 국가정보부의 비밀요원이던 강기택은 권력 상층부로부터 축출당한 뒤 요인을 암살하고 수배 중이다. 신임 시장이 지하철을 둘러보던 날, 강기택이 지하철을 탈취한다. 그 지하철에 탑승하게 된 소매치기 인경(배두나)이 짝사랑하던 장도준에게 연락을 해주고, 장도준은 강기택이 점령한 지하철을 되찾기 위한 사투를 시작한다.
■ Review할리우드의 유니버설 스튜디오 일부는 다인종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영화를 소재로 테마파크로 꾸며놓은 지 꽤 오래됐는데 그곳의 한 스튜디오에 들어서면 평범해 보이는 지하철역이 등장한다. 갑자기 역이 폭파되는 굉음이 울리면서 천장과 벽이 쩍쩍 갈라지고 비명소리와 함께 물벼락이 쏟아진다. 재난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착각의 시간은 불과 몇초에 지나지 않지만 스펙터클의 ‘리얼리티’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충분히 감탄스럽다.
그들의 노하우와 물량은 가뿐하게 역 하나를 부쉈다가 원상복귀시키는 요술방망이 구실을 하지만 한국영화는 그렇게 여의치가 않다. <튜브>의 ‘보물’은 8억원짜리 지하철 2량이다. 사실감을 확보하려 철근 뭉치로 지하철 두칸을 만드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 처지여서 컴퓨터그래픽과 미니어처를 이용한 야무진 기술력과 도시철도공사, 김포공항 같은 관계기관의 헌신적 협조가 필수적이다. 모처럼 그 박자들이 맞아들어갔다. 테러리스트 강기택의 가공할 솜씨를 보여주는 첫 장면은 터무니없지만 실감난다. 한번쯤 들락날락해봤을 낯익은 김포공항이 총격전으로 쑥대밭이 되는 건 흥미로운 진풍경이다(운좋게도 공항이 보수 공사 중이어서 전관대여가 가능했다). 터미널 어딘가를 폭파시키는 정도는 아니지만 시커먼 밴이 공항 내부로 거침없이 돌진해 들어오고, 자동차 전복장면이 위험스럽게 펼쳐진다. 모터사이클이 지하철 개찰구를 뛰어넘고 역을 빠져나가는 전철로 돌진하는 것도 황당한 설정이지만 그럴듯하다. 지하철을 볼모로 삼았으니 지하철 내부, 밑, 지붕, 조종실 등 좁은 공간에서 긴박감 넘치는 액션을 만들어내는 게 관건이다. 이것 역시 사뭇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다. 지하 터널에서의 폭발과 옥수역 폭파장면은 눈이 흔쾌히 속아줄 수준이다.
그런데 <쉬리> 이후의 블록버스터 ‘핏줄’을 온전히 이으려면 ‘비주얼’만으론 부족하지 않을까. <쉬리>는 냉전이란 소재를 냉전적으로 잘 활용했고 액션에 로맨스를 속도감 넘치게 갖다붙였다. <쉬리>의 공동각본과 조감독을 지낸 백운학 감독이 캐릭터와 플롯에서 <쉬리> 이상을 해낸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엔 한 가지 감상법이 필요하다. 격정적 캐릭터와 쓸쓸한 사랑이라는 홍콩영화식 스타일을 감상(感傷)적으로 즐기기(이건 조롱이 아니라 장르의 속성을 충실히 따른 오락영화를 즐기는 하나의 방법론일 것이다). 형사 장도준은 경찰청이란 지상에서 지하철이라는 지하로 활약무대를 바꾸고는 거칠 게 없는 인간이 됐다. 강기택도 권력의 수호천사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하고는 죽음도 불사하는 인간이 됐다. 강등당한 두 인생이 하필 원수지간이다. 잘 나가던 비밀요원은 권력의 횡포로 애인을 잃고 테러리스트가 됐고, 엘리트 경찰은 그 덕에 애인을 잃었다. 꼬리가 꼬리를 무는 형국이 된 그들에게는 복수와 응징이라는 악다구니의 운명만 남았다. 아쉽게도 테러리스트(박상민)에겐 독기는 있되 비애가 없으며 형사(김석훈)에겐 비애가 있되 서슬 퍼런 독기가 부족하다. 할리우드의 가공할 물량이 투입되는 조건이라면 감상적인 혹은 복합적인 캐릭터는 불필요할 것이다. 그것말고도 즐길 게 오죽 많은가. 그러나 비주얼 경쟁력에서 열악한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캐릭터마저 1차원으로 평범화하면 그건 오히려 위험한 선택이다.
독기와 비애를 나름대로 안배한 인물이 형사를 짝사랑하는 소매치기 ‘인경’(배두나)이다. 그는 테러리스트로부터 턱뼈가 부서져라 맞을지언정 고집을 꺾지 않으며, “결국 모든 게 사라져간다. 기억만 남는다. 사는 게 뭐 별건가. 달콤한 기억 하나 갖고 있으면 그만”이라며 절망을 냉소하고 견딜 줄 안다. 그에겐 뭔가 아픈 과거가 있어 보이지만 그걸 드러내진 않는다.
지난해 재난이 됐던 3대 블록버스터에 비하면 확실히 업그레이드된 비주얼과 인경의 쓸쓸한 눈빛은 심상치 않다.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 쇼치쿠가 180만달러를 주고 이 영화를 선뜻 산 게 이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적어도 관련은 있어 보인다. 아마도 그들은 제2의 <쉬리> 효과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 예측은 곤란하나 질문은 남는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와 한국의 블록버스터는 소재와 이야기 구성에서 어떻게 차별화가 가능한가, 대중성이라는 안전장치가 필수적이겠으나 블록버스터와 사실적인 캐릭터(그리고 내러티브)는 양립불가능한가.
:: 컴퓨터그래픽과 지하철 세트전체 10분의 1 분량 CG 처리, 스릴 만점
<튜브>의 또 다른 주인공은 컴퓨터그래픽(CG)과 지하철이다. CG가 쓰인 분량은 전체 2500컷 중 250컷으로 10분의 1에 이른다. 옥수역이 테러로 폭파되는 장면은 미니어처 제작을 기본으로 삼고 CG로 사실감을 부여했다. 미니어처 폭파에 3대의 카메라를 돌렸는데 제작 여건상 고속카메라는 1대만 써야 했다. 고속으로 찍어야 진짜 같은 중량감이 나기 때문에 나머지 두대의 카메라를 고속으로 찍은 것처럼 CG로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넣어주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미니어처 티를 내는 파편들을 화면에서 지워내는 작업이었다.
지하철은 세트촬영용으로 직접 만든 2칸말고도 CG용으로 전량을 다 만들었다. 가방 폭탄이 터널 안에서 터지고 달리는 지하철 뒤로 화염이 쫓아오는 장면이 있다. 화염은 터널 미니어처를 이용해 고속 카메라로 찍었고, 달리는 지하철은 실제로 촬영했다. 하지만 지하철은 실제 찍은 건 버리고 CG로 만든 걸 써야 했다. 전철 뒤에서 화염이 밀려오면서 밝아지는 효과를 내야 하는데 실사로는 그게 불가능했다. 또 잠실철교 위를 위태롭게 달리는 장면이나 차량이 분리되는 장면 등 지상 선로를 달리는 지하철은 모두 CG로 만들어냈다. 2호선 선로를 달리는 7호선 차량을 실제로 촬영할 수는 없었으니까. 지하철 밑에 매달려 이동하는 김석훈은 정지해 있는 지하철 세트에서 촬영하고 굴러가는 바퀴와 바람에 의한 먼지나 연기, 배경 등의 효과를 모두 CG로 만들었다.
5개월에 걸쳐 만든 지하철 세트에는 실제 지하철에 없는 몇 가지 장치를 추가했다. 최후에 극적인 순간을 연출하는 소도구라고 할 주전력 차단 스위치, 김석훈이 테러범이 타고 있는 칸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바닥 뚜껑, 박상민 부하가 수동식으로 지하철 운행방식을 변경하기 위해 조작을 가하는 선로 제어기 등이다. 지하철 세트는 현재 양수리종합촬영소에 있다. <튜브>에서 무상기증했고, 촬영소쪽은 보상 차원에서 후반작업비 일부를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