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임가흔)은 새로 이사 간 낡은 아파트에서 죽은 원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공포에 빠진다.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정신과 의사 짐(장국영)의 치료를 받게 된 얀은 짐과 가까워지면서 공포를 극복하지만 정작 짐에게 죽은 첫사랑의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
■ Review<이도공간>은 영화적이지 않다. 영화적으로 볼 때 <이도공간>은 상투적이고 신파적이다. <성원>과 <성월동화>의 각본을 쓰면서 ‘죽음’을 눈물샘 자극이라는 지상 목표에 봉사하는 소재로 활용했던 나지량이 직접 감독한 이 영화에서 사용되는 ‘원혼’도 기본적으로는 그런 소재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디 아이>나 <링> <검은 물 밑에서> 같은 아시아권 공포영화가 요즈음 공통적으로 관심 갖는 ‘원혼’의 심리적 깊이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짐(장국영)을 쫓아다니는 원혼도 그 끔찍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사다코’의 태만한 인용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도공간>은 어떤 울림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영화적이진 않지만 연극적이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거절받을 때마다 자살을 기도하는 얀이 보는 원혼은 반드시 ‘반사’돼서만 보이고 직접 보진 못한다. 짐도 물속이나 거울, 유리 등을 통해서만 원혼을 본다. 여기까지는 원혼이 자기 안의 것이고 심리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기반한 1인극이다. 하지만 짐의 원혼이 거울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는 얀이 그 거울 노릇을 하는 때이다.
무대를 꼭 닮은 옥상의 모서리에서 짐이 원혼과 대화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실은 상처받은 이들이 서로의 치유를 위해 역할극을 하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이코드라마’라는 것을 드러낸다. 영화적으로는 매우 작위적인 갈등의 해결을 영화가 한번도 아닌 두번씩 감행하는 이유도 기본적으로는 사이코드라마가 참여한 환자와 관객 모두의 치료를 목표로 하는 탓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주는 비상한 울림이 무엇보다도 (당연히) 장국영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위대한 비극이 주는 ‘울림’은 흔히 불꺼진 극장에서 비극의 주연들이 관객이 돌아간 다음에도 극을 계속하는 것으로 상징화되곤 하는데 장국영이야말로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난 한참 뒤까지도 우리의 뇌리 속에서 연기를 계속하는 그런 비극의 주연이 되었으므로. 결국 ‘이도공간’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