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정은 공간을 초월해버리는 사람입니다. 가회동의 한켠, 기와지붕이 구름처럼 휩싸고 있는 김호정의 작은 공간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마치 독일 슈바빙의 작은 카페쯤으로 변하고 맙니다. 같은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늘 다른 공간 속을 유영하고 있는 것 같은 영혼, 짧은 시간 동안에 그 이질적인 분위기를 상대편에게 감염시켜버리고 마는 사람. 어쩌면 <나비>의 안나가 독일에서 온 여인이라는 기억의 바이러스가 제게 침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비>로 로카르노영화제에서 받은 청동표범 한 마리가 위엄있는 자세로 내려다보는 가운데 지인들이 구석구석 남긴 낙서들이 빙그레 미소를 자아내는 그 공간은 호화스럽지는 않지만 주인을 똑 닮아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나비> 끝난 지도 꽤 오래 되었네요….” 그렇게 그는, 그 사이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부름을 받아 히로시마로 건너가 <응시 혹은 2002년 히로시마>라는 영화를 찍었던 기억과 30도로 깎아지른 듯 가파른 무대 위에서 러시아 스탭들과 힘들게 연습했던 연극 <보이체크>이야기, <플란다스의 개>를 함께했던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잘 돼서 너무 다행이라는 안도와 오는 6월 말부터 연습에 들어갈 연극 <페르소나> 소식까지. 지나온 몇년과 다가올 얼마간을 소곤거리는 이야기 속에 녹여냈습니다. “영화는 너무 급한 마음으로 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저 좋은 감독, 좋은 시나리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고요. 요즘엔 어떤 게 좋은 시나리오인지 모호해졌긴 하지만.” (웃음)
그녀의 창가에 살포시 기대어 있는 한 여인의 초상은 지난 인도여행에서 들른 피카소 전시장에서 사온 것입니다. “피카소의 연인이었대요. 보통 피카소가 만났던 여자들이 작고 연약했는데 이 여자는 체격도 크고 시원시원하게 생겼죠? 그냥 이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렇게 늙을 수 있다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요.” 짧은 만남이 마치 긴 여행처럼 기억될 사람 김호정, 그러고보니 그림 속 그녀와 당신이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