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시스템이 탕진한 재능,다시 타오르다,배우 서기舒淇
2003-06-11
글 : 박혜명
사진 : 정진환

감독 허우샤오시엔이 처음 서기를 만났을 때 그녀의 인상은 “오랫동안 일에 치여 과로상태에 있던 사람”이었다. “홍콩의 영화산업 시스템은 배우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좋은 연기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 수많은 배우들이 여기에 지친 나머지 극히 수동적인 상태에 빠졌다.” 그러므로 그는 걱정스러웠다. <밀레니엄 맘보>의 ‘비키’는 큰 폭의 감정 변화를 요구하는 역할이었지만 서기가 이를 감당할 만한 예술적 깊이를 가졌을 거라고 신뢰하긴 힘들었다. 그는 한 사람이 연평균 5∼6편의 영화를 소화해야 하는 시스템 속에서 ‘남발’수준으로 일해온 배우였다. 게다가 출연작들은 대부분 유치한 할리우드 복제품이었다. <밀레니엄 맘보>의 출연 제의를 수락한 그녀조차 “내 자신을 완전히 다 소진해 버려서 더 쏟아부을 게 남아 있지 않은 듯한 상태였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행적 뒤에는 매니저 맨프레드 웡이 있었다. 홍콩에서 잘 알려진 제작자이기도 한 그는 서기를 발굴해 스타로 키운 당사자이자, 배우의 영양상태를 증진시킬 메뉴는 거절하고 돈이 되는 아이템만 걸러내는 안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서기의 말에 따르면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제안은 매니저가 받아서 나에게 통보했고, 그 제안들은 거의 내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맨프레드 웡의 결정적인 실수는 <와호장룡>이었다. 이 영화를 준비하던 리안 감독은 장쯔이가 맡은 고관 옥대인의 딸에 애당초 서기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의 긴 촬영기간이 일본 코카콜라 광고 촬영과 겹치자 웡은 후자를 선택했다. 결국 서기 대신 말에 올라탄 장쯔이가 중국 대륙의 사막을 가로질러 오스카 시상식장까지 내달렸다.

이런 식으로 성장한 스타 서기에게서 허우샤오시엔이 기대한 것은 서기가 가진 기존 이미지의 다른 복사물, 약간의 변종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시간 속에 살면서 피자마자 시들어버리는 젊음을 이야기하는” 영화의 의도에도 걸맞을 수 있었다. 갈 곳 모르고 방황하는 청춘의 천진난만한 미소쯤이야 서기에게서 찾기 어려운 건 아니었으니까. 그 미소는 그녀가 배우로서 쌓아온 이미지의 한쪽, 드물게 생긴 입술과 넓은 이마 그리고 동그란 눈매에서 비롯되는 ‘귀엽고 생기발랄한 소녀’와 ‘위험천만한 악녀’의 교집합 속에 있는 것이었고 배우 이전에 찍었던 누드 사진집과 데뷔작 <옥보단2>에서부터 거의 완성돼 있던 것이었다. ‘제대로 된 누드영화’는 사실 <색정남녀>를 포함해 단 두편뿐이었을지라도 그를 특정한 종류의 배우로 규정하기에는 충분했다. <럭키 가이>와 <빅 타임>의 귀엽고 순진한 소녀, <신투차세대>와 <버추얼 웨폰>의 진지하고 세련된 여인의 역할도 그녀의 요부 혹은 창부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었다. 허우샤오시엔이 채집할 수 있는 건 그중 한켜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촬영을 마칠 때 즈음 그의 결론은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밝고, 본능으로 꽉 찬 사람이다.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감정적으로 풍부하고 격렬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감독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서기의 ‘예술적 에너지’는 “‘비키’의 캐릭터에 단순함과 순수함을 새로 불어넣었다”. 이건 배우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사과하고픈 감독의 인사치레가 아니다. <밀레니엄 맘보>에서 서기는 문득문득 불안해하며 신경 날카로운 비키를 연기하면서도 한없이 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건 단지 비키가 그러했으리라는 짐작의 연기가 아니라 이제껏 그녀를 붙잡아맸던 시선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봐주는 태도를 느낀 자연인 서기의 표현이었다. 무엇보다도 데뷔 이후 줄곧 동면상태에 가까웠던 그녀의 배우적 직관이 팔딱이는 맥박을 되찾은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서기의 타고난 이런 자질을 진작부터 알아보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아는 맨프레드 웡은 <와호장룡>이 개봉한 뒤 이렇게 말했다. “영화를 봤으니 알겠지만 그 영화에서 장쯔이는 리안 감독이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다. 서기가 했더라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이상을 능가할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었다.” 장만옥은 서기가 영화배우를 그만두고 싶다고 하소연할 때 “작품을 적게 하는 건 괜찮지만 그만둘 생각은 말아라. 그건 범죄나 다름없다”라고 강하게 충고했다. 장만옥이 보는 서기는 “누군가 시키기만 하면 그 어떤 배우보다도 훨씬 더 깊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유리의 성>에서 단지 “절반의 최선만 다했던” 서기의 연기는, 함께 출연한 다른 배우들의 열렬한 노력을 모두 압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서기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옥보단2>를 만들었던 웡징은 “무명인데다 대만 출신의 배우라면 예술영화나 수준높은 상업영화를 할 생각은 꿈도 못 꾼다. 서기는, 자기가 벗지 않으면 스타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고 그걸 자신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그는 당시 서기의 연기를 보면서 그녀가 반드시 유명해질 거라고 장담했었다). 그리고 자신을 쓰레기 같은 홍콩 상업영화 더미 위에 굴려왔던 매니저에 대해서도 좀더 현명해졌다. “이젠 그에 대해 나 자신을 좀더 방어하고 나를 덜 알리고 싶다. 일에만 초점을 맞출 생각이다. 그는 나를 돈 버는 데 이용하고 난 그를 온갖 관리에 이용하는, 프로페셔널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맨프레드 웡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인가를 솔직히 인정했다. “우리가 갈라선다는 생각을 하면 두렵다.”

대만과 홍콩 사람들은 서기의 영화를 즐겨보면서도 그의 불완전한 광둥어 발음을 욕한다. 서기가 “끔찍한 재앙”이라고까지 표현했던 홍콩 언론은 그가 거만하고 욕심많고 잔인한데다 다른 배우들이나 언론에 비협조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럼에도 <색정남녀>로 대만과 홍콩의 연기상을 쓸어간 여배우가 7년 뒤 다시금 꼿꼿하게 올라선 위치는 쉽게 무시되지 못할 것이다. <밀레니엄 맘보>는 소멸돼가는 청춘의 시간, 그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지만 서기의 시간은 소멸되지 않고 곧게 뻗어나갈 거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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