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해피엔딩을 ‘전제’로‥ <에블린>
2003-06-17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Story

1953년 아일랜드 더블린. 데스먼드 도일(피어스 브로스넌)의 가족은 배고픈 크리스마스를 맞는다. 설상가상으로 아내는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떠나가버린다. 아동학대방지협회는 도일의 딸 에블린과 두 아들을 고아원으로 데려간다. 이때부터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한 도일의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 Review

<에블린>은 한 가족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헐벗은 크리스마스 풍경으로 시작한다. 벽 장식가(사실은 미장이라고 불러야 옳겠지만) 도일은 직장을 잃었고, 아내는 술집에서 만난 다른 남자와 떠나가버렸다. 직장과 아내를 잃은 도일에게 국가는 법의 이름을 앞세워 아이들까지 뺏어간다. 옳지 못한 법과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에블린>은 시나리오 작가 폴 펜더가 스코틀랜드에서 우연히 실제 인물 에블린을 만나 그 이야기를 직접 듣게 되면서 착상한 것이라고 한다), <에블린>은 켄 로치의 영화가 아니므로 법의 어둡고 무서운 구석까지는 담아내지 않는다. 가장 소박한 의미에서의 인간미를 선사한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1989)의 감독답게 브루스 베레스퍼드는 도일의 딸 ‘에블린’의 이름을 제목으로 선택한다.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의 감격을 약속하면서, 그러니까 해피엔딩을 ‘기대’가 아니라 ‘전제’로 삼으면서 영화는 진행된다.

때문에 사회적인 고투의 장으로도, 부녀가 주고받는 자극적인 만담의 장으로도 들어서지 않은 채 경쾌하고 재치있는, 또는 위험없이 편안한 법정드라마가 후반부를 채운다. 때때로 그 편안함은 지나친 해피엔딩의 약속에 의해 자극없는 평범함을 연출하지만, 도를 넘지 않는 대사의 재치가 영화의 흐름을 조율한다.

매너 좋고 냉철한 007에서 거칠고 술 잘하는 아일랜드 보통 아버지로 탈바꿈한 피어스 브로스넌의 모습이 의외일지 모르지만, 하층민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여유롭게 캐릭터를 흡수한다(피어스 브로스넌은 이 영화의 제작도 겸하고 있다). <에블린>은 모든 로맨틱코미디가 꿈꾸는 ‘극적인 행복’이라는 소재를, 자식을 되찾으려는 아버지의 법정드라마 안으로 가져와 부정의 드라마로 탈바꿈시킨다. 다른 무엇보다도, <에블린>은 현실 속의 결과이기 때문에 믿고 싶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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