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매 무딘 이들이라도 대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이들이 얼마나 다른지를. 30분 일찍 도착했음에도 손예진(22)은 시간에 맞춰 스튜디오 문을 두드린 뒤 예의 조신한 자세를 취하고선 좀처럼 몸을 뒤틀지 않는 반면 차태현(28)은 성큼 들어서선 곧바로 안방 아랫목에 허리라도 지질 모양으로 소파에 몸을 뉘인다. 차태현이 “요즘 애들은 어쩌면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얼굴까지 잘생겼느냐”며 “가수는 오래 못해먹겠다”고 한바탕 너스레를 떨고, 그것도 모자라 <씨네21> 20자평을 들여다보며 “야, 이거 죽이네!”, “어, 이건 아닌데”라고 품평을 늘어놓는 동안 손예진은 간혹 미소를 지었을 뿐 테이블 위의 잡지를 뒤적이는 것으로 느린 워밍업을 시작했다. 6살 터울의 두 남녀는 이처럼 한눈에 봐도 상극이었다.
하지만, 스크린은 이들의 ‘다름’을 기꺼이, 즐겨 받아들였다. 첫 번째 만남이 이뤄진 건 지난해 5월, <연애소설> 촬영현장. 이들은 지환과 수인 역을 각각 맡아 사랑과 우정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동행하는 것으로 첫인사를 나눴다. 함께 촬영하는 분량이 많지 않아 서먹서먹했던 둘 사이에 온류가 흐른 건 6월27일 개봉하는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에 또다시 합류하면서부터다. “주일매는 내끼다! 아무 놈 한테도 못 준다!”는 혈서를 책상머리에 붙여놓고서 급기야 사법고시 1차 관문까지 통과하는 기적을 일궈내는 태일과 학생주임으로써 말썽꾸러기 태일을 온순한 양으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최대 목표인 아버지 영달의 계략에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일매. 기구한 운명으로 엮이는 두 남녀의 인생을 짊어지면서 이들은 좀더 친해졌다. 사진 촬영 도중 차태현이 장난스레 머리를 들이밀자 두상을 ‘찰싹’때릴 정도로. 여기에 그들의 또 다른 출연작 <엽기적인 그녀>와 <클래식>이 동일 감독이라는 인연까지 더하고 나면 이들의 ‘다름’에는 어쩌면 자신들도 모르는 친연성(親緣性)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애소설>의 이한, <엽기적인 그녀> <클래식>의 곽재용, 그리고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의 오종록 감독 등에게 곁말을 구해 이들의 ‘같고 또 다른’ 면면을 들여다봤다.
1 Round | 태일 VS 일매
“태일이야, 순양아치죠, 뭐. 예전에 했던 것들이랑 성격은 비슷해요. 환경만 다르지 다들 순정파거든요. 다르다면 <연애소설>의 지환이는 좀 착하고 <엽기적인 그녀>의 견우는… 음… 걔는 좀 얄밉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태일이는 과격하다뿐이고 ” 담임선생님의 곱디고운 딸 일매를 얻기 위해, 처절하다 싶을 만큼 열렬히 구애작전을 펼치는 태일. <해피투게더> <줄리엣의 남자> 등 이미 2편의 드라마에서 그를 기용, 애지중지 눈여겨본 오종록 감독은 처음부터 차태현을 염두에 두고 태일을 빚어냈다. “모든 게 편했어요. 영화사 사람들이나 예진이는 <연애소설> 때 봤고, 감독님하고 스탭들은 드라마할 때 봤으니까.”
“시나리오 초고 받았을 때 <클래식> 촬영 중이라 펴보지도 못했어요. 일매가 어떤 인물인지는 당연히 몰랐죠.” 주위에서 다들 재밌다고 해서 이후에 완고를 봤고, “풋풋한 사랑이 아닌 걸쭉한 사랑 이야기”에 끌려 출연을 결정했지만, 일편단심 태일을 못본 체하는 콧대 높은 일매를 받아들이기까지 손예진은 꽤 오랜 예열 시간을 필요로 했다. “<클래식> 끝내고 곧바로 촬영에 들어가야 했는데 집중이 안 되는 거예요.” 전작에서 시공간을 오가는 1인2역을 떠맡아 극 전체를 이끌어야 했던데다 “입증된 것 하나 없는 신인에게 쏟아지는 부담을 짊어지는 것이 무척이나 버거웠던” 탓에 손예진은 제작진의 배려로 자신의 촬영 분량 중 상당 부분을 뒤로 미루어야 했다고.
2 Round | 껄렁이 VS 범생이
차태현은 호기심이 많다. 하루에 수십통씩 전화받는 매니저에게조차 “누구야? 왜 걸었대? 뭐가?” 하고 물어본다. 스스로를 가리켜 “되게 산만하다”는 그는 좀처럼 한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제 연기도 그래요. 많이 움직이고 돌아다니고. 드라마할 때부터 카메라 감독님들이 되게 싫어했어요” 꽉 짜인 동선이 갑갑한 건 설정이나 분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그만의 연기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병헌이 형은 계산 연기가 짱이거든요. <해피투게더> 할때, 병헌이 형처럼 해보겠다고 했다가 설정 만들어놓고 슛 들어가서 다 까먹었요. 그 뒤부터는 기본적인 것만 알고 가요. 일부러 대본도 많이 안 보고.” 오죽했으면 한 광고회사에선 차태현에게 대사없이 무작정 애드리브 연기만을 주문했을까. “오감자 아니 오 감독님도 표정이나 호흡에 중점을 둔 애드리브를 무척 좋아해요. 그런데 이번엔 부산 사투리가 신경이 가선지 잘 안 되던데요. 출연하는 신이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고.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는 10분의 1 이하예요.”
어릴 적 손예진은 “풍뎅이 다리를 뜯으며” 혼자 놀았다. 돌이켜보면 “정상은 아니었다”는 게 그녀의 말. 지금도 “이런저런 생각하다가 실행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라는 손예진은 그래선지 촬영 초반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시동이 남들보다 좀 늦게 걸리는 편이다. “<연애소설> 때만 하더라도 다음날 촬영이 있으면 잠을 잘 못 잤어요. 지금도 촬영이 끝나면 뭘 해냈는지, 뭐가 미진했는지 따져봐야 직성이 풀려요.” 한번이라도 작업한 감독들은 그녀의 철저한 준비성과 함께 한번 불붙으면 겉잡을 수 없는 집중력에 대해 언급하곤 한다. 곽재용 감독이 <클래식>을 찍을 때의 일화다. 인물의 동선을 바꾸자고 스크립터에게 자그만한 목소리로 전했는데 멀찍이 떨어져 있던 손예진은 대답을 가로채기라도 하듯 “감독님, 어느 쪽으로요?”라고 금세 눈치를 챘을 정도였다. “현장에서 대사의 세세한 호흡까지 코치하는 감독보다 사전에 감정선에 대해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는 쪽이 아무래도 편하다”는 그녀. 오종록 감독은 그녀를 “우직하다”고까지 말한다.
3 Round | Comedy vs Melo
“드라마할 때 코믹한 이미지가 굳어지면 어떡하냐는 소리 많이 들었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거 보려고 오는 거예요. 제가 갑자기 진지한 연기 해봐요. 그럼, 변신 잘했네, 하고 박수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배신감을 느낄 거예요.” 차태현은 단호하게 자신의 목표는 짐 캐리와 박중훈이라고 못박는다. “기존의 틀을 다 깨고서 방향을 트는 건 아니라고 봐요. 사실 여기서 더 변신하려면 남은 건 악역밖에 없어요. 이번에 사투리 쓰고 머리 뽀글하면 됐지, 여기서 더 무슨 변신을 해요.” 그에게 변신은 허물을 벗어던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더하는 그 ‘무엇’이다. 홀어머니에게 ‘문디 자쓱’이라 욕먹던 개망나니에서 일매와 결혼하겠다는 일념으로 하루아침에 개과천선한 <첫사랑…>의 태일은 만취한 엽기녀의 구토를 온전히 받아주던 견우의 일그러진 얼굴과 사과한다는 의미로 어디선가 떼어온 시계를 되돌리던 지환의 순수한 얼굴을 떠올리게 만든다.
차분한 매무새의 손예진은 천상 멜로영화의 히로인이다. 본인도 “영화든, 드라마든 러브 스토리가 없으면 좀처럼 빠져들지 못한다”고 말한다. “시나리오를 대할 때 멜로를 좋아하는 관객으로서 아무래도 손이 그쪽으로 더 간다”는 것. 첫사랑의 화살을 받는다는 점에서 전작들의 캐릭터와 일맥상통하지만, 이번엔 좀더 통통 튀는 캐릭터다. 일매는 대학에 진학한 뒤에야 이성의 결핍을 느끼게 되고, 급기야 수영복 차림으로 과감하게 대시, 태일에게 유혹의 올가미를 던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녀는 후반부 촬영에서 “슬픔을 어느 정도 머금고 있어야 하는지” 무척이나 곤혹스러워했다. “감정의 120%까지 보여줘야 하는 <클래식>과는 정반대였다”는 그는 “후반부에서 드러나지만, 일매의 감정은 바깥으로 노출되면 안 되는 슬픔이거든요. 그 전까지는 관객도, 태일도 알아선 안 되고, 혼자만 지니고 있어야 하는 감정인데 그 톤을 잡기가 어려워 고생했어요”라고 털어놓는다.
4 Round | 無慾 VS 欲望
차태현은 자신에겐 “욕심 같은 게 없다”고 말한다. 대개 상대 배우와 은근히 벌이는 기싸움 같은 것은 죽어도 하기 싫다. “드라마 조연할 때 주연배우들끼리 그런 걸로 신경전 벌이는 거 보고 저렇게 되면 안 되겠다 그랬죠. 저도 처음부터 주인공 했으면 나중에 힘들었을 텐데. 한 단계씩 커온 건 다행이라고 봐요.” 그는 자극도, 경쟁도 원치 않는 것일까. “근데, 정말 좋은 영화를 보면 우울해져요.” 얼마 전, <살인의 추억>을 보면서 자기가 할 수 없는 연기와 마주했고, 거기서 주저앉았음을 슬그머니 돌려서 털어놓는다. “그렇다고 저런 연기를 언제가 꼭 하고 말리라, 그런 건 없어요. 그냥 그렇다는 거죠. 뭐.” 말끝에선 냉소가 고개를 쳐들었지만, “음반은 더이상 내지 않을” 서른 어귀에 다다르면 그는 돌연 또 다른 뭔가를 찾아나설 것이다.
손예진은 언제나 욕구불만이다. 자신의 연기에서 “퍼펙트한 느낌이 전해져오지 않는다”는 자가진단은 그녀를 연신 채찍질한다. “항상 가능성만을 인증받는 배우로 꼽히는 것도 이제 좀 지겨워요. 그걸 가능한 한 빨리 벗어버리고 싶고. 다른 걸 계속 도전해보고 싶거든요” 단순명료한 것말고 분열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여성의 심리에 도전하고 싶다는 그녀는 “최근에 TV에서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를 다시 봤는데 피아노를 쓰다듬는 장면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그 목표에 다다르기까지 정해진 왕도와 마련된 정답이 없음을, 손예진은 또한 안다. “아직도 개인으로서의 손예진을 극중 캐릭터에 끌어들이는 것이 부끄럽고, 싫다”는 그는 “대학 1학년 때처럼 수업 땡치고 PC방 가서 고스톱칠” 자유는 잃었지만, “연기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는” 자유를 얻었고, 그녀는 거기서부터 다시 출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