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조건들을 생경하게나마 충족한 <튜브>
2003-06-21
글 : 김용언
오락이 비극으로 간 까닭은?

“너는 일어났으면 하고 기다려왔던 바로 그런 사고(accident)”(U2, Who’s Gonna Ride your Wild horses 중에서)

화해무드로 접어든 한반도의 두 정상이 악수하고 앉은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스타디움에서 남북 축구대표팀이 축구경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어딘가 구석에서 가공할 액체 폭탄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사고다. 그러나 실은 모두가 그 사고를 기다려왔다고 해야겠다. 영화관 밖에서 남북은 시종 살벌한 분위기로 으르렁거리고 (적어도 그 당시에는) 두 정상이 만나 평화로이 악수를 나누고 축구경기를 관람할 리가 만무했으므로 스크린 저 구석에서 액체폭탄이 끓고 있다고 호들갑을 떤들 그것은 차라리 좀 애교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지루한 냉전의 찌끼들이 반세기 이상 내려앉아 좀 지겨웠던 탓인지 그러한 사고(accident)를 열렬히 환영했다. ‘사고’야말로 전혀 새로운 ‘원더랜드’나 ‘중간계’를 만들지 않고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에 전혀 다른 판타지를 직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쉬리>가 처음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의 금광맥으로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러한 ‘사고‘가 견고한 현실을 기묘하게 전복하면서도 결국 안전하게 매듭지을 거라는 전제하에서, 제한된 제작비와 물량을 가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물론 모든 사고는 좀더 빠르고, 좀더 격렬하며, 좀더 큰 굉음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고 구경’인 블록버스터의 기본 전제다. 모든 것은 ‘사고’의 스펙터클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막대한 특수효과와 물량 동원이 필수적이라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사고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대박을 노린 이런 유의 기술적으로 진일보한 어떠한 이후의 볼거리도 결코 <쉬리>를 넘지는 못했다. 충무로의 ‘재앙’이었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나 <아 유 레디?> <광시곡> 같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유령>이나 <무사>도 제한적인 성공에 그쳤을 뿐이다. 이러한 실패의 원인은 산업적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실은 그 ‘사고들’이 딱히 구경하고 싶지 않은, 다시 말해서 ‘은근히 기다리던 사고들’이 아닌 탓이다. 다시 말해 ‘사고’의 화려한 스펙터클이 주는 놀라움만으로는 기본적으로 규모와 비주얼의 완성도에서 압도적인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를 능가할 수 없다. ‘사고’의 성격을 사유해야 함은 따라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현재 상영관에서 <튜브> 옆에 걸려 있는 것은 <매트릭스2 리로디드>이다).

일상적 공간을 낯선 미로로 환기

그렇다면 <쉬리>의 조감독 출신이 메가폰을 잡은 <튜브>는 과연 거듭되는 실패를 만회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모범 답안이 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폭탄과 테러리스트를 싣고 서울 시내 지하철 노선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하는 이 사고가 모두가 (사실은 은근히) 기다려왔던 사고일 수 있을까? 마치 <쉬리>의 ‘사고’가 한반도의 냉전적 상황이라는 해묵은 키틴질의 단단한 현실에 둘러싸인 관객에게 그 얼개 밖으로 단 두 시간이나마 발을 내딛게 해주는 전복적인 쾌감을 제공했듯이 ‘사고’ 그 자체의 볼거리로서가 아니라 관객이 상영관 문을 통과하여 들어오기 전의 그 바깥과의 현실과의 화학반응이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상업적 혜안을 보여주는가? 물론 이러한 질문은 영화의 완성도나 각본의 치밀함, 연출의 세기(細技)와 같은 결과물에 관한 판단을 유보한 상태에서 제출되는 것이다. 다만 그 ‘사고’가 현실의 평범하고 단단한 얼개를 한순간에 전혀 다른 것으로 돌변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그 낯섦을 제공하느냐 못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튜브>는 확실히 직전의 50억원 제작비 이상의 거대 프로젝트들이 걸었던 길을 우회하여 <쉬리>가 갔던 그 전략을 다시 재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실재의 김포공항에서 총격전을 벌일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지만 테러리스트 강기택이 선로를 변경하고 폭탄을 열차에 실으면서 출근과 통학으로 대표되는 일상들의 환유로서만 존재하던 역사와 선로들을 서울 시내 지하 밑에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도시 동굴로 일순간에 돌려놓는 순간에 일상적 공간이 완전히 낯선 얼굴을 하고 드러난다. 이것은 몇분마다 한번씩 도착하는 전동차가 들어오는 터널 저 안쪽으로 무엇이 있는지 가끔씩 살펴보던 우리의 그 몇분을 두 시간으로 확장시키는 아주 특별한 ‘사고’이다. <쉬리>가 CTX 탈취와 폭파라는 ‘사고’를 통해서 역사를 낯설게 보는 환기를 스펙터클의 추가분으로 제시했다면 <튜브>는 서울 시내를 꼼꼼히 아우르는 전혀 낯선 미로 공간을 환기시킨다.

흔히 <튜브>의 원전이나 비교대상으로 지목되는 <스피드>의 경우처럼 악당은 이 모든 소란이 정해진 시간이 끝나면 정리되고 원래 자리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오히려 시민적 일상공간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불만을 대리하여 위악적으로 표출한다. 시장이 탄 객차를 점령하는 강기택이나 러시아워에 길가에 세워둔 차들을 계속 들이받으면서 가는 한이 있더라도 속도를 줄이지 못하는 <스피드>의 버스는 교통체증에 또는 지루한 하루 일과에 지친 시민들의 ‘전복적 공상’을 그대로 실현한다는 점에서 ‘실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교통 사고’인 셈이다. 이렇게 하여 <튜브>는 강기택이라는 허깨비를 동원해 일단 현실의 공간들을 ‘이상한 나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집단 죄의식의 반영

그러나 ‘여전히 허약한 드라마’, ‘드라마의 부재’와 같은 말들은 <튜브>에도 질기게 따라붙는다. 이 부분은 간단히 말할 수가 없다. CG나 세트, 액션장면의 ‘눈요기’에 너무 많은 공력을 쏟아붓느라 드라마를 등한히 한 많은 선례들과 <튜브>가 예외적으로 다른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며 액션 연기의 빠른 호흡 때문에 캐릭터 이해가 깊지 않고 피상적인 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불편한 지점은 서로 미묘한 상호반응을 일으키지 못하고 거칠게 튀는 캐릭터들과 배두나에게 거의 전담하듯 맡겨버린 멜로 파트의 불균형으로 충분히 실소를 자아내며 이전의 선례들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하다가 모종의 ‘신파의 코드’들(혹은 ‘뽕끼’)을 막판에 건드리며 드라마 부분의 공백을 덮어버리면서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반칙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드라마를 ‘잘 살리지 못했다’기보다는 애초에 배두나라는 영화 내의 조커를 투입할 때부터 ‘방기’했기 때문이다. (배두나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파에요…. 마지막에 대중이 울어요… 이럴 수도 없고… 우리나라 스타일에 맞게… 대중성은…”).

실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이상한 지점 또는 드라마를 방기하는 사회구조적인 음모(?)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관객이 갖는 영화에 대한 기대나 태도는 <스피드>의 관객이 갖는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도식적으로 말해서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영화라는 ‘허구’나 ‘환상’이 주는 어떤 효과에 대한 기대인 점에서 동일하지만 전자가 주로 영화라는 환상(illusion)을 통해 우리 자신이 속한 있는 그대로의 삶 혹은 현실을 ‘거리감’을 갖고 보기를 기대한다면 후자는 확실히 견고한 현실의 아우라에서 잠시 피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쪽은 나름대로의 미덕을 가지고 있고 공통분모도 가지고 있다. 앞서 말했던 블록버스터의 조건이랄지 전략도 결국 현실에서 한 발짝 나가 있다가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상영관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도 물론이다. 하지만 블록버스터에서의 ‘현실’은 어디까지나 롤러코스터를 통해 빙빙 돌면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과 같은 것이라서 제시간이 되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온다(혹은 되돌아와야 한다). 전복적이고 상식을 뛰어넘는 극단적인 ‘사고’들을 위악적으로 깔아놓아도 그것이 ‘실은 우리가 바랐던 사고’일 수 있는 것도 결국 주인공이든 누구든 깨끗하게 청소를 하면서 우리의 은밀한 상상력의 죄책감을 면피케 해주기 때문이다. 현실도피? 물론 그렇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은 영화관의 어둠 속을 기어이 비집고 들어와 스크린 안에서 기어나온다.

열심히 <스피드>를 벤치마킹하던 <튜브>도 갑자기 어느 지점부터 선로를 변경하기 시작한다. 사고는 해결하지만 결국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CTX의 폭파는 막아도 연인을 쏴죽이며 결말짓는 <쉬리>의 예처럼. 마치 화려한 액션을 소비하듯이 관객은 블록버스터에서 ‘비극’을 소비하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그 ‘비극’은 그다지 영양가가 높지 않(아도 상관없)다. <튜브>는 그 ‘비극’이 ‘비극’이 되게 하려고 실제 지하철에는 있지도 않은 ‘주전력 차단스위치’란 걸 만들어 객차에 싣는가 하면 그걸 이해시키려고 3D그래픽으로 프리젠테이션까지 서슴지 않는다. 비극은 이미 주어졌고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정작 멈추지 않는건 지하철이 아니고 바로 이들을 비극으로 몰아세우는 감독과 관객의 무서운 강요다.

‘사실은 바라고 있었던 사고’였다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유보되었던 한 가지 사실은, <튜브>의 개봉일을 연기시켰던 대구 지하철 참사가 상징적으로 웅변한다. 문제는 그 누구도 현실을 도피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이 현실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 장도준이 배두나와 키스하면서 지하철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은 결국 현실도피적인 환상을 보러 와서도 비극을 끌어들여 가짜 극복을 경험하려는 우리의 집단 죄의식의 반영일 것이다. 사고를 수습하며 상상력에 면죄부를 주는 따위의 해피엔딩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공식에는 따라서 맞지 않다는 것을 감독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튜브>는 희생양을 끼워넣으며 <쉬리>가 달성했고 그 후발주자들이 놓쳤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조건들을 생경하게나마 재구성하여 <쉬리>의 적장자가 된다.

이렇게 해서 이 이상한 ‘비극’은 진짜 ‘비극’들의 자리를 빼앗고 ‘깊이’나 ‘사연’이 있는 척하는 많은 가짜 캐릭터들의 반복되는 참살을 경험케 한다. 영화관을 떠나고 난 이후에도 덩그러니 남는 ‘여백’은 실은 비극보다 더 단단한 우리의 일상이며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관객에게 주는 자비롭고 냉혹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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