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조화’ 와 ‘절제’의 망각,<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2003-06-24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Story

경남고의 문제아 태일(차태현)은 학교 생물선생님 영달(유동근)의 딸 일매(손예진)와 결혼하기 위해 물불 안 가리는 녀석이다.어느 날 영달은 이런 태일의 혈기를 거꾸로 이용할 잔꾀를 떠올린다. 자신의 딸만큼 공부를 잘하면 결혼하게 해주겠다는.태일은 영달의 말만 믿고 코피를 쏟아가며 공부해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다.드디어 결혼하게 됐다고 좋아하는 태일,하지만 영달은 다시 일매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요구한다.순진한 태일은 영달의 뜻에 따라 대학 4년간 남자들의 손길로부터 일매를 지키지만 마침내 사법고시 1차시험에 합격한 그날,일매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태일이가 아니에요”라는 말이다.

■ Review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의 주인공 태일은 ‘엽기적인 그놈’이다. <엽기적인 그녀>의 일편단심 청년 차태현의 새로운 버전인 이 녀석은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영한사전을 통째로 외우고 씹어먹는다.수백명 학생이 보고 있는데 영도다리 아래에서 아랫도리를 벗는 용기를 내는가 하면 전국 30만등에서 시작해 전국 3천등 안에 드는 불굴의 의지도 보여준다.<공포의 외인구단>의 까치나 <국화꽃향기>의 승우도 태일에 비하면 감내할 고통이 그리 크지 않았다.<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태일의 수난기를 코미디로 변주한다.

처음엔 태일의 사랑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분명하다.바로 일매의 아버지 영달. 딸을 지키려는 아버지와 상대하는 코미디라면 <신부의 아버지>에서 <미트 페어런츠>까지 꽤 많은 영화들이 있지만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는 영달이 태일의 선생님이라는 설정을 덧붙인다.선생님으로서,딸의 아버지로서 일석이조를 꾀할 방법은 무엇인가? 태일을 바람직한 제자로,사윗감으로 만들기 위한 영달의 계략은 성공한다.태일은 서울대 법대를 들어가서 4년간 손 한번 잡지 못한 채 일매의 곁을 지키며 마침내 사법시험에도 합격한다.그런데 여기서 끝인 줄 알았던 태일의 고난은 멈추지 않는다.영달의 마음을 얻고 기뻐하는 사이 이번엔 일매의 마음이 달아나고,꼬리에 꼬리를 무는 소동은 제동장치가 풀린 기관차처럼 질주한다.갈수록 태산인 태일의 좌충우돌이 웃음의 뇌관이라면 여기에 불꽃에 일으키는 건 찰진 부산 사투리다.심각한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구석구석 단디 가리고 나온나”, “비 맞은 중 맹키로 뭐라고 씨부리쌌노?” 같은 대사는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는 반전의 묘미가 있다.<가문의 영광>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활용한 것과 같은 전략이다.하지만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의 사투리 구사는 같은 지방에서 출생한 <친구>처럼 유창한 수준은 못 된다. 다소 어색한 억양인데다 같은 부산 사람인데도 유독 일매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아름다운 그녀가 사투리로 말하는 건 ‘깬다’고 생각한 탓일까? 아무튼 사투리 구사가 문제가 되는 건 일매가 예외라는 점에 국한되지 않는다.이 영화는 ‘사투리=코미디의 언어’라는 등식에 입각해 목소리톤을 계속 높인다.한번쯤 멈춰 호흡을 가다듬을 여유가 없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코미디 효과는 반감되고 과장된 연기는 두드러진다.처음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에게 장편영화의 리듬감까지 기대하는 게 무리였을까?

알려진 대로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는 드라마 <해피 투게더> <줄리엣의 남자> <피아노> 등을 연출한 오종록 PD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영화데뷔작이다.<피아노>의 조재현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에서 영달과 태일이 조재현과 다르지 않다는 걸 눈치챌 것이다.“니는 점점 예뻐지는데 내는 추잡어지고오,치다도 못 볼 데로 니는 가고 있는데 내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엄꼬오”, “지금부터 내는 니가 숨을 쉬라 카모 쉬고,멈추라 카모 멈춘다” 등 과거 시청자의 눈물을 뽑았던,순정으로 똘똘 뭉친 대사는 그 증거다. 의사(疑寫)부자관계인 영달과 태일이 서로 업어주는 장면 역시 <피아노>에서 조재현과 고수가 보여줬던 것이다.그들은 평생 한 여자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남자들이고 대중은 그런 사람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누구나 소망해봤지만 이뤄본 적 없는 사랑의 이상향,그것을 오종록 감독은 ‘아사다 지로(<철도원> <파이란>의 원작자)식 판타지’라 불렀다.그는 <피아노>에서 성공을 거둔 이런 전략을 영화에 그대로 차용하지만 TV만큼 잘하지는 못했다. 철저한 멜로드라마였던 <피아노>와 코미디가 강조된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의 차이이기도 하다.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는 표면적으로 차태현,유동근,손예진 세 배우의 영화이지만 코미디와 드라마의 큰 흐름을 끌고가는 것은 차태현과 손예진이 아니라 차태현과 유동근이다.<피아노>의 조재현을 연상한다면 유동근의 비중이 막대한데 실제 영화는 차태현 혼자 고군분투하는 인상이 강하다.마음의 짐을 안고 사는 유동근의 아픔이 좀처럼 전해지지 않고,속내를 숨기는 손예진의 사연은 끝까지 석연치 않다.차태현의 코믹연기가 시종 유쾌하게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불균형 탓이 클 것이다.<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는 여러 가지 흥행코드를 갖췄지만, ‘조화’와 ‘절제’라는 기본 항목은 깜빡 잊고 말았다.

:: 오종록 감독 인터뷰

“울리면서 웃기고,웃기면서 울리는 게 좋다”

영화를 구상한 계기는. 고등학교를 밀양에서 나왔는데 그 시절 개인적인 경험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다.

평소에 교육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이상적인 선생님 상을 그려보자는 생각도 있었다.아무런 비전없이 사는 아이들이 많은데 걔들한테 교육적 동기를 제공하는 건 전교조로도 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영화에서 영달은 고등학교 다닐 때 불량학생이었지만 여자가 아이를 낳고 죽자 마음을 잡은 인물이다.그런 자기 경험 때문에 애들을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사정없이 때리지만 그만큼 아이들한테 애정을 준다.그런 선생님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별한 여인을 잊지 못하는 남자, 영달은 <피아노>의 조재현을 연상시킨다

실질적으로 같다.<피아노>를 만들 때 ‘아사다 지로식 판타지’라는 부제를 붙였다.2년을 같이 살다 죽은 여자를 잊지 못해 온갖 박해를 견디는 인물,그것은 아사다 지로의 소설이 그리고 있는 세계과 비슷하다.영달 역시 죽은 여인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이고 태일의 지금 모습은 영달의 젊은 날과 같다.사랑이 존재의 이유가 되는 사람들이다.그걸 만화처럼 동화처럼 그리고 싶었다.

심각하고 진지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코미디로 풀었다.그게 <피아노>와 다른 점인데.

<피아노>도 초반엔 코미디가 많았다.내가 86년부터 드라마 조연출을 했는데 80년대엔 다들 엄숙하고 장중한 드라마를 좋아했다.별것 아닌 것도 폼잡고 연출하는 식이었다.하지만 90년대로 넘어가면서 가벼운 드라마들이 쏟아졌다.92년에 입봉을 했는데 94년 무렵부터는 무거운 이야기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그때부터 스타일을 바꿔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고 경쾌하게 풀어갔다.코미디가 당의정으로 진지한 멜로드라마를 감싸고 가는 식이다.목욕탕 가서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들어가면 혈액순환에 좋다고 하지 않나? 울리면서 웃기고,웃기면서 울리는 그런 장면을 좋아한다.

영화는 처음인데 드라마 연출할 때와 많이 달랐나.

많이 다르더라.드라마 PD를 할 때는 전체의 관리자였는데 영화감독은 시스템의 일원일 뿐이더라.촬영도 많이 다르다.화면이 워낙 크니까 액션과 리액션을 따로 잡을 필요가 없더라.때문에 원래 980컷으로 예상했던 영화가 800컷 조금 넘는 것으로 정리됐다.이야기가 한 화면 안에 다 들어오기 때문에 굳이 나눠 찍을 이유가 없다.다음에 영화할 때는 연구를 더 해야겠더라.

시나리오 쓸 때 배우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나.

차태현은 처음부터 염두에 뒀다.차태현과 세 번째 같이 하는데 차태현의 스타성에 도움을 받아보자는 생각도 있었고,워낙 연기를 잘한다.어디서 배운 것도 아닐 텐데 연기를 본능적으로 잘하는 배우라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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