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멋지다! 그녀의 자율적 성윤리가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2003-07-03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파격적인 성과 사랑의 관점에 지지 선언!

에로비디오만 찍던 감독의 극장용 영화가 개봉하였다. 영화는 성묘사의 수위뿐 아니라, 성과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파격성을 보인다. 이 파격성의 정점에 새로운 여성상이 있다. 영화는 기존의 낭만적 사랑의 서사를 폐기하고 있으며, 여주인공은 주체적인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구현하고 있다. 이에 비해 남자주인공의 사랑법은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는데, 이 영화는 그 실패의 지점을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낭만적 사랑의 서사를 폐기하다

거의 모든 멜로영화와 드라마들은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키스하며 끝난다. 일종의 공식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러한 공식을 깨는 영화들이 출현하고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베터 댄 섹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등에서는 남녀가 처음 만나 다짜고짜 섹스부터 하고 본다. 잉? 그러면? 그 다음은? 이제부터 사랑이 시작이라고? 사랑이 뭔데?

흔히 ‘사랑’ 혹은 ‘낭만적 사랑’이라 부르는 환상은 어떤 서사(narrative)를 지닌다고 믿어진다. ‘낭만’ 혹은 ‘로맨스/로망스’라는 말 자체가 ‘이야기하기’라는 뜻을 지니며, 근대의 낭만적 사랑의 발생은 소설의 대중화와 시기가 일치한다고 한다. ‘낭만적 사랑’의 당사자는 어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며, 그들이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상대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생을 살아온 사람이다’라는 것을 털어놓고,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며, 그의 역사를 알기 원한다(이와 대척되는 것이 ‘묻지마 관광’과 매매춘의 매너이다. 그런 데서 인생사 묻는 자가 가장 밥맛이란다). 그뿐 아니라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 내가 누구이기를 원하는가’ 하는 복잡한 추리를 하느라 머리가 빠질 지경이다.

우리는 상대에게 나의 서사를 주고, 그의 서사를 받기 원한다. 그리고 그만이라도 나를,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고 기억해주길 원한다. 마치 신(God)이 나를 알 듯이, 지구상에서 아무도 나를 모르더라도 그만이 나를, 나의 내면을, 나의 무의식을 알기 원한다. 내가 그에게 나의 진실을 알려주었으므로 그가 이 궁창 속에서 내 존재의 증거가 되길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내가 만나 우리만의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가길 원한다. ‘우리 만난 지 100일 됐어요~’ 기념일을 챙기고, 이벤트를 열고, 사진첩을 꾸미는 일들이 모두 전형적인 ‘낭만적 사랑 만들기’에 해당한다. 낭만적 사랑의 항해에 이정표가 되는 것이 흔히들 ‘진도 나가기’라 부르는 성적 접촉이다. 손잡기, 키스, 애무, 섹스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들 말이다. 이러한 코스는 우리에게 너무도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만약 섹스를 너무 빨리 하게 되면, 당황하기도 한다. “아… 이런, 실수했네… 이제 어쩌지?” 그런데, 하는 동안 좋았으면 됐지, 대체 뭐가 실수라는 걸까? 섹스 자체가 실수인 것이 아니라 전체 서사에서 섹스의 배치가 실수라는 것인데, 과연 그 서사가 그다지도 절대적일까?

만나자마자 섹스부터 하고 난 우리의 세 커플들은 어찌 되었나? <결혼은…>에서 이들은 ‘낭만적 사랑의 서사’ 쓰기에 빠져 있다. 심지어 그녀는 특유의 연극기로 서사를 과장하고, 소비한다. <베터 댄 섹스>의 이들은 뒤늦게 ‘낭만적 사랑’의 징후를 포착하고 전형적인 ‘허둥대며 서로를 찾다 다시 만나기’를 재현함으로써 ‘낭만적 사랑’에 귀의한다. 그들은 모래시계 모양의 서사를 쓴 셈이다. 사실 이들은 ‘낭만적 사랑’의 서사와 지향을 폐기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맛있는 섹스…>의 이들, 특히 그녀는 ‘낭만적 사랑’의 서사를 애초에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며, 마지막까지도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녀는 “내가 좋으냐, 싫으냐?”는 남자의 질문에 “처음 만난 남자가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아무런 환상없이 대답한다. “그럼 나랑 사귈래요?”라는 남자의 제안에 “원래 손부터 잡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며 가볍게 응수한다. 그녀의 쿨한 대사를 ‘낭만적 사랑’의 진지함을 조롱한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예지원이 처음 만난 남자와 섹스하다 말고 “저를 사랑하나요? 사랑하지 않죠? 흑흑…” 하던 속이 빤히 뵈는 대사와 비교해보라!

반면 남자는 상대적으로 ‘낭만적 사랑’의 서사로부터 덜 자유로운 것으로 묘사됨으로써 ‘낭만적 사랑’의 신화가 여성에게 더 맹신된다는 통설을 뒤집고 있다. 그는 전화로 “I love you, 사랑한다는 그 말밖에는♬”이라 노래부르고, “나 어때요?”라고 재차 물으며, 그녀를 비디오로 촬영한다(‘낭만적 사랑’이 통렬히 조소되고, 특히 여성에 의해 묵살된 예로 <조폭 마누라>가 있긴 하다. 청혼을 한답시고 느닷없이 꽃을 사들고 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대사를 읊어대고, 결혼 첫날밤 ‘결혼의 서약’을 하는 남자에 대한 그녀의 뚱한 반응, “어디. 해보슈”, “그거 나두 해야 돼?”). 이후 그녀는 그를 분명히 사랑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낭만적 사랑의 서사를 쓰지는 않는다. 사실 <베터 댄 섹스>와 같은 결말은 달콤하긴 하지만, 그다지 진실이 아닐 것 같다. 이 영화는 서사를 재구성하기보다는 아쉽지만 쿨한 헤어짐을 택한다.

가부장적 순결강박에서 벗어나다

언젠가 한 여성학 교수로부터 여대생들에게 가장 야한 상상을 적어보라고 하였더니 거의가 ‘그가 나의 어디를 만지는’ 이야기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성주의 감독의 섹스신은 남다를 것이라던 <밀애>의 섹스신 역시 보여지고, 만져지고, 칭찬받는 그녀뿐이었다(<밀애>가 전하는 여성주의적 교훈은 ‘위자료받을 수 있을 때 이혼하라’가 전부인가 싶다). 그러나 <맛있는 섹스…>의 그녀는 다르다. 그녀는 남자의 성적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녀는 남자를 유혹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녀는 남자와 대화하다 격렬한 키스를 상상하고, “눈이 참 예쁘다”고 혼잣말한다. 그녀의 속옷을 보고 멋있다고 칭찬하는 남자에게 더욱 고혹적인 자세를 취하는 대신 “비싼 거예요”라고 응수한다. 그녀는 남자의 성기를 더듬고 움켜쥐며, 남자의 몸에 먼저 올라탄다. 그녀를 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관음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그녀가 남자에, 섹스에 환장을 하여, 아무하고나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한 남자하고만 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순결강박에서 벗어난 것이지, 자율적 성윤리를 폐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시기에는 한 남자하고만 한다’는 원칙을 스스로 정하고, 지킨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애인 있느냐는 말에 “많아요”라고 대답하고는 곧이어 “끝냈어요”라고 선언한다. 그녀는 이 선언과 동시에 과거의 남자와는 결별하고, 이제부터는 이 남자하고만 섹스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맛있는 섹스를 즐기며, 나눈다. 그리고 그와 헤어져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에 전 남자를 만나 “사귀는 사람 없는데…”라고 종언하고 그와 격렬하게 섹스한다.

그녀는 헷갈리거나 우유부단하지 않다. 그녀는 개방적이면서도 명쾌하고, 단호하다. 또 자신을 사랑하기에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나를 싫증내는 그 순간은 더이상 참아내기 싫다”며 먼저 떠나고, 그가 찾아왔을 때 “그러지 않는 게 좋겠어”라고 분명히 입장을 밝힌다. 개방적이기만 하였을 뿐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못했던 <질투는 나의 힘>의 배종옥에 비해 진일보한 태도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들은 왜 헤어지게 되었을까? 그녀는 왜 그를 떠난 것일까? 그들의 시시덕 대는 즐거운 섹스는 어느새 균열음을 내기 시작한다. 그들의 문제는 세 가지인데, 다른 이성애 커플들에게서도 흔히 발견되는 것들이다.

첫째, 그는 그녀보다 둔감하다. 꺼리는 그녀를 달래가며 공중화장실에서 섹스하다가 엿보였을 때 그는 화가 난 그녀에게 사과하면서도 그녀가 무엇에 화내는지 모른다. 또 그녀가 “너 변한 거 알지?”라고 언질을 주었을 때도 그는 “내가 음식이냐, 변하게?” 하며 눈치를 살피지 않고, 알고자 노력하지도 않는다.

둘째, 그는 섹스를 비롯한 그녀와의 사생활과 직장에서의 공적 생활을 자연스럽게 조화시키지 못한다. 그녀는 그의 직장에 찾아가 그의 책상에 앉아보고 그곳에서 장난치며 애무한다. 반면 그는 직장에서의 비탄스러운 일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고, 무조건 짜증낸다. 더욱이 그들의 마지막 데이트는 그가 그녀의 (업무상의) 서울행에 동행하여 계속 불평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그녀와 함께 사적, 공적 일상사를 영위하기에 서툴렀으며, 섹스와 생활을 분리하여 생각하였다.

셋째, 그의 성적 요구가 일방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그의 섹스는 “너만 좋으면 다야?”라고 되물어질 만큼,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서두르는 것이 되어갔고, “어떻게 안 하냐?”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관행적인 것이 되어갔다. 그는 자신의 즉각적이고도 강렬한 오르가슴을 위해서 구강성교, 항문성교 등을 일방적으로 요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감정은 전혀 배려되지 못했다(그가 무리한 항문 성교를 시도하다가 “그만 하자”라는 시큰둥한 한마디로 접었을 때, 그녀의 옆으로 번지던 세탁기의 검은 물은 그녀의 참담한 심정을 잘 드러내준다). 급기야 그는 심야버스에서 펠라치오를 해주는 그녀의 입에 자기 감정에 빠져 “이기적인 사정”을 하기에 이른다. 그는 그녀와 더불어 생활의 이모저모를 나누고 즐기며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다만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는 도구로 전락시켰다. 그에 반해 그녀는 그의 허다한 요구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응해주었으며, 그가 찾아왔을 때도 그를 냉정하게 내치는 것이 아니라, “잘 기억해”라고 하며 그의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을 존중해준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일상적인 사랑법을 그에게 강요하지 않고, 환상을 덧씌우지도 않는다. 또다시 그가 싫증내게 될 것임을 잘 알기에 그녀는 되돌아가지 않는다.

영화 <불후의 명작>에는 에로비디오만 찍던 감독의 충무로 입봉 실패기가 나온다. 봉만대 감독은 그보다 유능하고, 믿음이 가는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많은 관객이 선입견을 벗고 이 영화를 본다면 국내에서 에로비디오를 찍었다는 경력이 프랑스 유학을 갔다왔다는 경력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나의 확신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그의 전작 비디오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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