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가장 미국적인 긍정적 휴머니즘,<브루스 올마이티>
2003-07-08
글 : 정승훈 (영화평론가)
■ Story

뉴욕 버팔로 방송국 리포터인 브루스(짐 캐리)는 맛깔나게 지역 소식을 전해주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앵커 자리를 탐낸다. 그러나 일이 꼬여만 가자 신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는데, 이 때문에 정말로 신(모건 프리먼)과 대면하는 일이 발생한다. 신은 그에게 일주일간 전능을 대여해주며 휴가를 떠난다. 브루스는 보육원 교사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애인 그레이스(제니퍼 애니스톤)의 가슴 확장 따위에 초능력을 발휘하며 즐거워하지만, 점점 부작용이 커져가자 이번엔 신의 도움을 청하기에 이른다.

■ Review

알고보니 ‘성질 돋우기’였던 <성질 죽이기>는 오히려 <브루스 올마이티>의 부제로 적당할 듯하다. 노리던 승진 기회를 경쟁자에게 뺏긴데다 건달들한테 터지기까지 한 날, 브루스는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머피의 법칙’을 원망하며 생방송 카메라와 비오는 하늘을 향해 ‘뻑큐’를 연발한다. 이런 투덜이 스머프를 파파 스머프가 교화하여, 마음 떠난 스머페트와 다시 짝지어준다는 얘기가 이 영화의 동화적 골조이다. 어리숙한 순응자가 중재자를 통해 당당한 남자가 되어 여자를 되찾는다는 <성질 죽이기>처럼, 혹은 거꾸로 <브루스 올마이티>에서는 불만 많은 야심가가 중재자를 통해 긍정적인 남자가 되어 여자를 되찾는다. 애덤 샌들러는 소심한 머슴애에서 적극적인 가장으로 거듭나고, 짐 캐리는 이기적인 속물에서 이타적인 시민으로 재탄생한다. 과정상의 차이라면, 전자의 중재자는 일부러 교통체증을 일으키면서 노래나 부르게 하는 비현실적 상황을 기획하는 반면, 후자의 중재자는 막힌 도로를 홍해처럼 갈라놓고 신나게 질주하는 초현실적 상황을 허락한다는 점이겠다.

알고보면 뻔한 휴먼코미디의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브루스가 목매단 그 시청률), 톰 섀디악 감독과 짐 캐리는 쉴새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재롱을 떤다. <불의 전차> <타이타닉> <십계> 같은 중후한 대작의 얼토당토않은 패러디와, 신이 된 브루스가 사람들의 기도를 ‘야후’ 아닌 ‘야훼’ 메일로 접수하는 장면 등은 미국적인 장난기로 가득하다. 디지털 시대에 미국적으로 신을 재현하는 세련된 비주얼도 눈길을 끈다. 새하얀 텅 빈 공간에서 신이 “I’m the One”이라 말하거나 호수와 산맥이 포스트모던한 가상공간처럼 갑자기 펼쳐지는 <브루스 올마이티>는 <매트릭스>의 시뮬라크라에 가깝다. 갖가지 마술적 시각 효과와 물 위를 걷는 신의 모습 등은 결국 테크놀로지가 이 시대 신의 현현임을 말하는 듯하다. 이에 대한 성찰인진 몰라도, 브루스의 전능함(을 가능케 한 시뮬레이션)은 사소한 짜릿함이 심각한 폐해로 이어지는 나비효과를 낳는다. 애인한테 선물 주듯 끌어당긴 달 때문에 지구 저쪽에선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모든 사람들 소원에 ‘yes’를 클릭한 대가로 복권 인플레 같은 사회혼란이 초래된다. ‘브루스 올마이티’는 이때 ‘브루스 오마이갓’이 돼버린다.

<성질 죽이기>가 양키스 스타디움까지 동원해 9·11 이후 뉴욕의 기를 부추기듯, 버팔로 타운을 세트로 재현한 <브루스 올마이티>에도 시사적 알레고리의 여지는 존재한다. 브루스는 특종을 위해 운석이 떨어지게 하는데, 권능이 미디어화되는 동시에 천체의 질서를 파괴한 재앙이 된다는 점에서 운석 낙하는 미국이 불러일으키고 미국이 보도해댄 테러와 닮아 있다. ‘미스터 특종’(Mr. Exclusive) 브루스의 파워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미국의 패권과 겹치는 셈이다. 그 가공할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 그는 인류에의 봉사를 들먹이지만 신은 상투적이라고 꼬집는다. 브루스는 잠시 뒤 자기 아닌 다른 남자를 통해서라도 애인이 행복해지길 기도한다. <매트릭스2>에서처럼, 허구적 인류 구원보다 구체적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사랑이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되는 것이다. 그것만이 신도 움직일 수 없는 타자의 ‘자유 의지’에 의해 주체가 존중받을 수 있는 길임을, 미국영화가 미국을 대신해, 그리고 미국인을 향해 반성적으로 설파한다.

이런 가르침은 실상 타자들로 구성된 미국의 정치적 기원이지만, 미국이 잃어버린 교훈이기도 하다. 신을 흑인이면서 블루칼라이자 화이트칼라이고 최하층민으로도 설정한 컨셉은 탈권위적으로 인종과 계급을 혼융시키려는 미국성의 뿌리를 새삼 되살린다. <매트릭스2> 전후로 <성질 죽이기>와 <브루스 올마이티>가 미국에서 메가히트를 날린 데에는 상처를 추스르고 자신감을 찾아주는 처세술과 자신의 변화가 타자의 변화를 이끈다는 메시지도 한몫했을 듯하다. 이런 긍정적 휴머니즘은 평등과 조화를 추구하는 미국적 진보인 동시에, 여전히 와스프 남성 위주인 대중적 영웅주의와 중산층 가족주의를 웃음의 당의정으로 감싸는 미국적 보수이기도 하다. 끝없이 리로디드되는 풍성한 디테일로 그 진보성을 재현하는 전능한 기술에 미국 휴먼코미디의 위대함이 있다면, 미국의 변방에서 이런 영화들을 너무 많이 봐버린 관객에겐 그래봤자 보수성의 재연일 뿐이라는 데 이 장르의 초라함이 있겠다. <브루스 올마이티>가 이런 한계까지 깨뜨릴 전능함을 지닌 건 물론 아니다.

:: 톰과 짐의 휴먼코미디 방정식들

영웅주의와 가족주의

<에이스 벤츄라>에서 만난 톰 섀디악 감독과 짐 캐리는 <라이어 라이어>에서 <브루스 올마이티>의 전례를 창조한다. 출세지향의 거짓말쟁이 변호사가 아들 소원으로 하루 동안 진실만 말하는 마법에 걸린 뒤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이때 주인공의 통과의례(입문)로서의 초현실적 상황(마법)을 야기한 중재자(아들)는 잃었던 여자(아내)를 되찾게 한다. 주인공은 아버지라 해도 사실 모성적인 여자(‘은총’을 베푸는 그레이스처럼)의 응석 많은 아들과 다름없다가, 실질적인 아버지(중재자)의 시험을 통해 진짜 가부장으로 성장한다. 이는 곧 아들이 아버지의 법(마법이든 전능이든)을 거쳐 여자 딸린 남자가 된다는 오이디푸스 도식이다. 여기엔 늘 여자 유혹자와 남자 경쟁자가 있는데, 전자는 사라지고 후자는 주인공과 화해한다. 상황은 원래대로 회귀하지만 인물은 영웅으로 변하고, 적대자는 통합되며 조력자들은 박수친다(공통적으로 거지도 포함). 인물처럼 변화를 겪는 디테일의 수미상응은 기본이다. <브루스 올마이티>의 시작과 끝은 쿠키와 헌혈, 두번의 전환은 교통사고로 나타나며, 브루스처럼 개도 권능을 얻었다 잃는다.

섀디악의 <너티 프로페서>와 피터 시걸의 그 속편은 <지킬박사와 하이드>류의 다중인격증을 통과의례로 삼는다. 여자를 사이에 낀 착한 루저와 잘 나가는 터프가이의 대립은 패럴리 형제들의 선호 구도이며 이들 감독에 짐 캐리 주연의 <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린>에서도 변주된다. 변신을 통한 여자 유혹의 신화적 원형은 제우스일 텐데, 이 난봉꾼 신이 아내 몰래 바람피울 생각만 했다면 근대 이후의 변신은 왜곡된 욕망으로 단죄되는 보수적 경향을 띤다. 이에 비해 짐 캐리의 <마스크>는 성공적인 욕망 발현과 성격 변신을 신나게 보여준다. 그의 뒤틀리면서도 어둡지 않은 표정은 <브루스 올마이티>까지 이어지면서 진짜 광대가 연기하는 ‘귀여운 마초’의 한 얼굴-가면을 예증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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