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류를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는 한 실험실에 동물보호운동가들이 무단으로 침입, 연구원의 경고를 무시하고 우리에 갇혀 있던 침팬지들을 풀어준다. 그리고 28일 뒤… 침팬지로부터 번져나간 바이러스는 영국 전역을 뒤덮는다. 많은 사람들이 도피했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은 살아남은 이들을 보면 미친 듯이 달려든다. 사고로 혼수상태가 되어 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짐(실리언 머피)은 깨어난 뒤 런던 시가지 전체가 텅 비어 있는 것을 알고 불안해한다. 그는 한 성당에 들렀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신부로부터 공격받게 되고 곧 일군의 감염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때 감염자들을 피해 은신해 있던 셀레나(나오미 해리스)와 마크(노아 헌틀러)가 나타나 그를 구해준다.
■ Review두편의 흥미로운 영화 <쉘로우 그레이브>(1994)와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1997)을 만들었는가 하면, 등장인물들만큼이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뜀박질영화’ <트레인스포팅>(1996)과 지루한 <비치>(2000) 등을 발표해 갈지자 필모그래피를 밟아온 대니 보일의 신작은 일단 다음과 같은 공상에서 출발한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도시 전체가 텅 비어 있다면? 우선 불안감이 스멀스멀 온몸을 헤집기 시작하겠지만 그 낯선 풍경이 주는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대니 보일의 의 시작은 이처럼 익숙하고 낡은, 하지만 약간은 매혹적인 공상에 기대어 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주인공 짐이 홀로 거니는 인적없는 런던 거리의 풍경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다. 이러한 풍경을 포착하기 위해 제작진은 인적이 드문 이른 아침에 촬영을 진행했으며, 신속하게 작업이 이루어지도록 여러 대의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기도 했다. 분명 디지털 이미지의 질감은 이 묵시적인 폐허의 풍경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문제는 이 영화에서 진정 흥미로운 부분이 딱 여기까지라는 거다.
약간은 테리 길리엄의 (1995)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초반부 이후, 짐이 한 성당에서 처음으로 바이러스 감염자와 대면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영화는 조지 A. 로메로 스타일의 좀비호러의 세계로 차츰 깊숙이 빠져든다. 정말이지 대니 보일은 로메로의 ‘시체 삼부작’을 한몫에 해치우면서 그에 대한 압축정리판 안내서라도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여기엔 로메로의 작품들이 간직하고 있던 알레고리 및 풍자적 요소들은 온데간데없다. 예컨대 로메로가 <시체들의 새벽>(1978)에서 그들이 인간이었을 때처럼 여전히 백화점을 서성이는 좀비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현대 소비사회의 풍경을 우스꽝스럽게 뒤틀었다면, 대니 보일은 그저 ‘사람들이 온통 사라진 빈 도시의 상점에서 공짜쇼핑을 즐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울까’라는 식의 다분히 치기어린 상상력만을 드러낼 뿐이다.
는 ‘시체 삼부작’에서 종종 보여지곤 하던 하드고어적 비주얼들에 천착하는 대신,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셔터 스트로브(shutter strobe) 효과를 통해 벌건 눈을 가진 좀비와도 같은 감염자들의 기괴하고 격렬한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인간들을 향해 멍한 상태로 느릿하게 다가오던 로메로의 좀비와는 다른, 좀더 빠르고 게걸스러운 좀비들을 만나게 된다. 덕분에 는 호러라기보다는 액션장르에 훨씬 가까운 텍스트가 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라디오 수신기를 통해 맨체스터에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한 지역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 들은 뒤, 일군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요새와도 같은 저택으로 향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여정을 통해 영화는 ‘시체 삼부작’의 마지막 영화, 즉 <죽음의 날>(1985)의 공간으로 이행할 기회까지도 얻게 된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는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공포보다는 인간집단 내부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좀더 초점을 맞추는 양상을 띤다. 맨체스터의 한 저택을 요새로 삼아 감염자들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고 있던 군인들은 사실 감염에 대한 공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간혹 요새를 향해 다가오는 감염자들은 그저 그들에게 한바탕 몸풀이를 위한 구실을 제공할 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을 맞기 전에 어떻게든 요새로 여자들을 끌어들여 성욕을 채우는 것이고, 짐과 동행해서 요새로 찾아온 셀레나와 소녀 한나를 통해 그러한 ‘희망’이 충족될 것이라는 기대는 그들로 하여금 웨스트 소령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게끔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이제 짐은 두 여인을 군인들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영화 전체를 주인공 짐의 정신적 성장기로 놓고보면 는 결국 ‘아버지가 되는 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살한 부모의 사체를 확인하고 슬픔에 빠져 있는 그에게 대리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것은 한나의 아버지인 프랭크이다. 이 ‘자상한 아버지’가 요새에 도착하자마자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군인들의 총탄에 맞아 죽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엔 새로운 보호자, ‘두려운 아버지’인 프랭크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대항하기 위해 짐은 감염자들의 힘을 적극 활용하고 어느 정도는 감염자들의 행동을 모방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잠정적인 것이며 일종의 가면놀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대니 보일이 로메로의 텍스트가 지닌 함의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은 명확해진다. 한나는 셀레나와 키스하는 짐을 잠시 감염자로 착각하지만 곧 그가 ‘정상’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둘의 관계를 ‘승인’한다. 이제 남은 것은 새로이 형성된 이 의사(擬似)-가족에게 구원이 다가오는 것이다.
에 가끔 적잖이 우스운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영화는 게걸스럽기 짝이 없는 좀비들이 등장하는 호러영화들을 보면서 품게 될 법한 궁금증 하나를 확실히 해소해준다. 만일 모든 인간들이 다 좀비가 되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정답은 ‘결국 모두 굶어 죽는다’는 것이다. 더이상 먹이를 찾지 못하고 쓰러져 죽어가는 감염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을 보다보면 정말이지 웃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유머를 잃은 좀비영화가 얼마나 지루한 것인가를 감독이 좀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하다.
:: 대니 보일 감독 인터뷰“좀비보다 더 두려운 ‘분노’의 공포를 담았다”
는 <비치>의 알렉스 갈란드가 시나리오를 썼다. <비치>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는데, 다시 그의 시나리오를 선택한 이유가 있는가.첫 번째 페이지에 제목이 없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 다음 페이지에 부제 가 있었고, 이야기는 중요한 사건이 이미 일어난 다음 순간부터 시작됐다. 이야기 자체도 매혹적이다. 나는 바이러스가 유출되어 대혼란이 일어나는 영화를 많이 봤지만, 의 전제는 조금 다르다. 이것은 심리적 바이러스이며, ‘분노’와 관련이 있는 바이러스다. 그리고 이런 폭동이나 분노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신 집의 창문을 타고 내부로 들어오는, 핏속에 존재하는 무언가. 이것이 바이러스이고 전염병이다.
당신이 SF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의외의 일로 보인다. 또 이 영화는 호러영화, 특히 좀비영화의 특징도 지니고 있다.나는 장르라는 한계를 뛰어넘고자 노력했다. 장르의 범주 속에 존재하고, 그것을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 결국 그 장르의 벽을 확 열어젖히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는 심리적인 바이러스가 전제한다는 SF적 전제를 깔고 있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형제 자매나 절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죽여야만 한다. 당신은 당신이 감염자가 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혼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28일 후>가 공포를 만드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공포영화를 보는 관객은 누가 죽든지 신경쓰지 않는다.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짐과 셀리나, 영화를 이끌어가는 두 젊은이에게 관객이 동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물론 괴물들도 무서워야 했다. 무섭지 않은 괴물이 나오는 공포영화란, 만들 이유가 없다.
<28일 후>는 당신의 새로운 성공작이 될 수 있을까.이 영화가 성공하려면 사람들이 항상 느끼는 불쾌감과 연결되어야 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위험의 요소 말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쥐덫이고, 그 안에 들어가면 꼼짝없이 90분 동안 얼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다음에는 극장 밖으로 빠져나와 이제 괜찮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다. 매우 무서우면서 상쾌한 영화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정리 김현정·자료제공 이십세기 폭스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