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영화를 빚어내는 걸까, 영화에 녹아드는 걸까. <싱글즈>에서 본 수헌이라는 캐릭터와 인터뷰를 통해서 얻은 배우 김주혁의 느낌이 어찌나 비슷한지, 마치 경계가 없는 사물을 만지듯이 황당하다.
두명의 싱글 여성을 중심에 둔 이 영화에서 수헌은 나난(장진영)이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갈등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시나리오는 그를 반듯하고 적극적이고 낙천적이고 순수하고 기타 등등 매력덩어리로 묘사하지만, TV드라마나 영화에 워낙 자주 나타나는 캐릭터라서 도리어 밋밋하게 정형화될 위험성이 크다. 더구나 김주혁은 이런 쪽의 전문 브랜드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가.
역시나 영화 초반부에 수헌/김주혁은 예의 그 냉정하고 점잖은 얼굴로 조용히 등장해서 한동안 지켜보는 시선 역할만 한다. 그러다가 나난이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생맥주 맛이 이상하지 않느냐며 거듭 마셔보라고 하더니 “이상하다, 내 입술이 닿았는데”라고 ‘작업 개시’를 한다. 김주혁은 이 대사를 느끼함과 귀여움, 수줍음이 3분할된 상큼한 칵테일로 표현했다. 예상 밖의 유쾌한 일격을 당한 관객이 웃음을 ‘퓨우∼’ 터뜨리고, 이때부터 반듯한 수헌/김주혁의 이미지에도 자잘한 주름이 잡혀 있다는 것이 발견되며 그 주름 하나가 펼쳐질 때마다 객석에 웃음이 자글자글 흐른다.
“수헌이 시나리오에 묘사된 것만큼 멋지지 않아야 하고, 역할의 표면보다 그 반대면을 찾아내서 깎아내려야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보았던 김주혁의 분석이 적중한 셈이다. 본인은 “별 캐릭터 아니에요, 흐흐…. 평범한데 약간 극대화되어가지고 미화된 거죠”라고 실없이 흘리듯 이야기하지만, 독특하게 코드화된 한국영화의 남성 캐릭터들 사이에서 이 “특별하지 않은 남자의 세련된 순수함”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촬영 내내 엄정화, 이범수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했을 만큼 장진영과 둘이서 찍는 신만 있었던 김주혁은 시사회에서 영화 전체의 느낌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웃겨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영화 찍는 느낌이 아니라 스토리는 잔잔한데 캐릭터들이 극대화되고 웃음도 좀 피어나고 그래서 반응이 좋은 듯해요. 역시 시나리오가 좋아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대사를 음미하면서 영화를 본 게 처음이네요. 전에는 ‘나 어떻게 하나 봐야지’ 했는데 이번에는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객관적으로 봤어요. 그냥 영화 보러 온 기분이 들고 재밌더라구요.”
이런 모습도 일종의 경지인데, 거기까지 가자면 몇번의 쓰라림은 겪었을 터. 스스로 정리도 못한 채 열심히 하려는 의욕뿐이었다는 <세이예스>, 전체적으로 풀 숏의 느낌이라는 <YMCA야구단>을 통해 자신의 한계에 갇혀본 사람이 얻게 된 초연함. 그 비워진 마음자리에 내려진 조용한 선물일 것이다.
사실 김주혁이 연기자로서 밭갈이를 해온 시간은 세편의 영화 이상이다. 대학을 아예 연극영화과로 진학했고, 졸업 뒤 극단 생활 1년을 거쳐 방송사 공채에 합격한 것이 1998년. SBS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엄격함의 굴레에 갇힌 듯한 과학도로 출연, 향후 이미지의 출발점을 형성한 것이 2000년 무렵이다.
<카이스트> 이미지에 대해서 김주혁은, 일관성이라는 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고 본인의 실제 캐릭터와 어긋나는 측면도 있지만 그게 있기에 다른 걸 해도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했다. 김주혁식 화법의 특징은 편안한 균형감각인 것으로 보였다. 대단한 달변이거나 너무 진지하거나 자의식적인 코믹함 그 어느 쪽도 아니지만, 이들 요소가 두루 뒤섞여 있다가 차가울 정도의 단정함이 순간적으로 허물어질 때 슬쩍 비어져나왔다. 그리고 그 귀퉁이는 금세 봉합된다. 제작사쪽에서는 “가만히 있다가 한마디씩 던져서 모두를 뒤집어놓곤 했다”고, 촬영 기간 중의 김지혁을 소개했다.
그는 자신이 왜 연기를 하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문을 연 뒤, 왜 연기를 하게 됐는지 차근차근 설명해나갔다. 아버지(김무생)의 영향일 거라는 일반의 예측을 그는 철저히 부인했다. 원래의 꿈은 “동물병원 차려서 일확천금 하는 것”이었단다. 지금처럼 애완동물 사업이 번창하지 않은 시절에 “이거 분명히 될 산업이다. 보험처리 안 되지. 돈 번다 이거” 하며 수의사가 되는 인생설계를 했다고. 그 당시의 성격은 ‘짜증날 정도의 까불이’라서 친구들이 대체 왜 그러냐고 걱정할 정도였는데, 김주혁은 그것을 내성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자기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장난을 빌려서 하는 것이라는 거다.
고등학교 시절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비로소 의식적으로 생겨났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뒤에는 아예 극장에 붙어서 살다시피 했단다. 전공 과목은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고, 교양 과목은 시험칠 때 “교실에 앉아 생각나는 것 좀 쓰고, 미안하게 됐다고 쓰고, 글씨는 예쁘게 써보겠다고 쓰고 해서 두어장 채워내는” 식이었다. “그래도 C는 받았으니 교수가 안 읽어본단 소리야∼”라며 코맹맹이 소리를 낼 때의 김주혁은 영락없는 수헌의 모습이다.
그는 연기가 자신에게 일이자 취미생활이라는 둥 재미있다는 둥 묻지 않은 질문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다. 자기도취적 환상이나 순진한 팬에게 날리는 의례적인 멘트는 분명 아니었다. 대화를 종합해보면 자신의 일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인내, 자기 한계, 외적인 제약, 직업의 궁극적 특성까지 두루 언급했다. 다만 김주혁은 연기라는 것이 특별한 성취를 기록해야 하는 특별한 삶이 아니라 그냥 자신이 몸담아 살게 되는 무엇으로 여기는 듯했다. 이것이야말로 평생 연기를 업으로 해온 아버지의 영향일 것이다. 아버지와 분리하는 것이 자신의 살길이라며 연기에 관한 가장 깊은 고민조차도 의논하지 않고 어떠한 코멘트도 아버지로부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아들이, 어쩔 수 없이 아버지에게 지고 있는 이 빚!
짧은 대화에서 김주혁은 자신에 관해 많은 흔적을 남겼다. <싱글즈>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천 과장(조희봉) 나올 때”이고, 연기 이외에 좋아하는 것은 “옷 쇼핑”, 희망사항은 “술을 잘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엉뚱하고 자질구레한 이야기들도 듣다보면 모두 그럴싸했다. 반면 “나 자신이 모든 연기를 다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봐주는 사람이 어디까지 용인하느냐”라거나, “최고조로 내지르면 너무 오버로 보인다. 중요한 건 최고조로 내지른 다음에 연습할 때마다 조금씩 깎아서 표현할 때 밀도있는 연기로 보인다는 거다. 지금은 최고의 오버가 안 돼서 답답하다”, “나 자신에게 불안은 없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척’도 계속 하다보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말은 국외자로 하여금 연기라는 영역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단서들이었다.
술 못하는 게 인생의 유일한 ‘하자’라는 김주혁의 말은 분명 아이러니가 담긴 농담이다. 인간으로서, 배우로서 이런저런 ‘하자들’을 갖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하다보면 없어질 것”이라고 태연히 믿고 갈 수 있는 배포는, 아이러니 가득한 농담과 짝을 이루며 김주혁의 앞날을 천천히, 듬직하게 끌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