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의 감독 봉만대
2003-07-10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이혜정
섹스가 뭘까? 아직 잘 모르겠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영화사 기획시대는 충격적인 전단을 뿌렸다.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을 홍보하는 그 전단에는 <맛있는 섹스…>의 감독 봉만대가 나뭇잎 한장으로 가장 중요한 부위만을 가리고선 유혹하는 듯한 나체로 서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게 무슨 해괴한 짓거리인가, 탄식할 만도 하지만 봉만대 감독은 “다 벗은 것도 아니고, 잎사귀로 가렸는데, 그런 사진이 이슈가 되는 세상이 우습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처음 던진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이 튀어나온, 조금은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그러나 민감하게 날을 세우는 듯한 그 마음을 내칠 수만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봉만대는 너무 자주 소문을 탔던 이름이다. 그는 영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에로비디오 감독 출신이라는 이유로 언론에 오르내렸고, 영화 촬영 도중에는 온갖 낮뜨거운 에피소드로 화제가 됐으며, 촬영이 끝난 뒤에는 영화 제목에 ‘섹스’라는 단어를 썼다고 시달렸다. 어느 때보다도 곡절 많았던 1년을 보냈지만, 봉만대 감독은 아직 의연하다. “배우들과 함께 호흡하고 싶고, 재미있어서 벗었다”는 그는 에로영화를 만들고 있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다. 촬영기간만큼이나 길게 자랐던 머리카락을 짧게 쳐내고 나타난 그는 홀가분하게 영화를 털어버리는 대신 여전히 진행 중인 고민, 섹스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에 빠져 있었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은 당신이 만든 첫 번째 극장용 장편영화다. 이전과는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다. 비디오는 만들면 끝이었는데, 이번엔 책임질 게 많다.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 영화를 보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낯설다. 영화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 영화가 비디오 열다섯편 다음에 만드는 열여섯번째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영화를 몰랐던 거다. 혼자서 마스터베이션하다가 갑자기 여러 사람과 함께 마스터베이션하는 기분이랄까. 나쁜 평을 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건 괜찮다. 나쁜 이야기를 들으면 코너에 몰리는 기분이 들고, 그럴수록 내가 가진 것 이상을 끄집어낼 수 있을 테니까.

언론이나 평단의 반응은 엇갈리는 편이다. 관객은 어떤가. 성(性)이나 연령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이 영화를 받아들일 텐데. 나를 지지하는 카페 회원들하고 함께 영화를 봤는데, 20대 중반 이상 여성관객이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난한 사랑을 겪어본 사람들이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사랑에 대한 판타지가 남아 있는 어린 관객은 멜로영화를 좋아할 거고. 영화가 개봉한 주말엔 극장에 무대인사도 나갔는데, 토요일 낮인데도 여성이 많았다. 차마 “<맛있는 섹스…> 주세요”라고 말 못하고, “맛있는… 그거 주세요” “2관이요” 그러더라. 심지어 “자기야” 그러면서 남자친구 부르는 사람도 있고. (웃음) 농담처럼 “벌건 대낮부터 이런 영화 보세요. 영화 보고 나면 뭐 하시려고”라고 인사했지만, 이젠 여자들도 당당하게 섹스영화를 본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내 모토가 그거 아닌가. 남자랑 여자랑 손잡고 볼 수 있는 에로영화를 만들겠다는 거. (웃음)

반대로 생각하면 남성에겐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실제로 <맛있는 섹스…>가 기대보다 야하지 않다거나 에로영화의 상상력을 넓히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나도 남자니까, 남자들이 뭘 원하는지 안다. 봉만대가 에로비디오를 만들었다니, 에로비디오보다 더 심한 영화나 화면 사이즈만 커진 에로비디오를 보고 싶어했을 거다. 안 좋은 기억을 잊으려고 했는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일깨우는 이 영화가 불쾌했을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잡힌 존재라 여자들보다 훨씬 현실도피적이니까. 하지만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남자들끼리 둘러앉아 보는 영화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맛있는 섹스…>가 두고두고 떠오르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 연애할 때나 헤어질 때, 원 나잇 스탠드를 할 때 한번쯤 생각나는 그런 영화. 그래서 <맛있는 섹스…>가 한번에 확 타오르기보다 조금씩 관객이 들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제작자가 들으면 열받겠지만. (웃음)

제작사와 충돌는 없었나. 당신이 만든 에로비디오를 보고 기대한 부분이 있었을 텐데. <이천년> <아파바>처럼 드라마가 있고 노골적인 섹스도 있는 영화를 바랐던 것 같다. 만약 그때 나를 충무로에 데려왔다면, 나도 그런 영화를 찍었을 거고. 하지만 그 영화들은 내 초기작이다. 나는 변했다. 10대 때 알았던 성과 20대, 30대에 이르러 알게 된 성이 다른 것처럼. 50, 60이 되면 나는 또 다른 섹스를 찍고 있을 거다. 섹스에 관해서라면, 나는 100명과 맞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다. 프로듀서도 아트하지 말라고 해서 많이 싸웠지만, 도대체 아트는 뭐고 상업영화는 뭔가. 다만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는 제작자라기보다 기획자의 입장에서 영화를 잘 모르는 내게 도움되는 충고를 많이 해줬다.

<맛있는 섹스…>는 섹스를 위해 드라마를 깔아놓기만 하는 대신 드라마와 섹스가 맞물렸던 봉만대의 전작과는 많이 다른 영화다. 한 여자 신아가 있다. 막 애인과 헤어진 그녀는 하룻밤을 함께했던 남자 동기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사랑하고 동거하고 이별한다. 이것이 전부다. 범죄로 내몰린 청춘들의 사연을 재구성한 <이천년>이나 가난한 젊은이들의 짓눌린 꿈을 아파하는 <아파바>, 범죄영화의 형식과 결합한 <모모>처럼 섹스와 드라마가 함께 심한 굴곡을 오르내리지 않는다. 키스하는 입술의 마찰음이나 젖은 성기가 부딪히는 질척한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고는 해도, 관음의 쾌락을 주는 것도 아니다. 담담한, 그러면서도 필연적인 일상. 누군가 농담과 진담을 섞어 “에로판 <봄날은 간다>”라는 별명을 붙였을 만큼, <맛있는 섹스…>는 봉만대의 에로영화를 기대한 관객에겐 배신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그러나 봉만대는 어쩔 수 없다는 태도다. 영화과의 수업이나 충무로의 실무를 거쳐보지 않은 그는 그 자신만의 방법으로 영화를 바라본다.

<맛있는 섹스…>는 드라마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단조롭다. 시나리오를 여러 차례 수정했지만, 그 점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섹스도 드라마다. 섹스가 그저 헐떡거리거나 뒹굴어다니는 행위에 머물지 않고 뭔가 이야기를 한다면, 그게 드라마 아닌가. <리쎌 웨폰>을 보면 멜 깁슨이 전부 벗고 어떤 여자와 자는데, 영화는 거기에서 멈추고 다시 액션으로 넘어간다. 그 영화는 형사가 어떻게 범죄자를 잡는지 보여주는 게 중요한 목적이니까. 결국 뭘 보여주려 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이런 점도 있다. 한 영화에서 폭력이 전부가 될 수 없고, 섹스가 전부가 될 수 없듯, 이야기도 전부가 될 수 없다. 멜로영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동기가 신아에게 오럴섹스를 해달라고 할 때, 둘이 나란히 앉아 왜 지금 오럴을 할 수 없는지 이야기하길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로영화는 몸으로 말하는 거다. 생각해보자.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사건이 있다면 어느 한 사람의 마음이 변한다는 건데, 마음이 변하려면 상대방이 싫어져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싫어진다는 것은 몸으로 느끼는 거다. 그런데도 굳이 한 가지 방식의 드라마만 고집해야 하나.

하지만 영화 중간중간 ‘니꺼 귀여워. 내꺼랑 사이좋게 지내서’, ‘성기로 사과하기. 사정으로 위로받기’ 같은 자막이 끼어들어 영화를 직접 설명하기도 한다. 감독이 참 할말이 많았다는 느낌을 주는데. 맞다. 감독은 강박관념이 없을 수 없는 사람이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 관계, 헤어짐을 디테일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90분 안에 모두 담기는 힘이 들었다. 그래서 단락을 지어보는 게 어떨까 싶었다. <맛있는 섹스…>는 이야기가 너무 산만하고 대사도 없으니까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너무 감추기만 하면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나서 바보가 됐다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뭔가 있긴 한데, 나만 이해하지 못했다는. 상영시간을 늘릴 수도 있었지만, 영화를 처음 본 사람이 그러더라. 너무 길다, 우리 일상도 느슨한데, 영화까지 그래야 할 필요가 뭐 있느냐. 지금 생각해보면 영화를 너무 몰라서 저지른 실수였다. 비디오를 만들던 때는 시나리오대로 연기가 안 나오면 고치고 그때그때 편집하고 그랬었는데, 상업영화는 시나리오대로 찍어야 하는 것 같다.

제작비가 부족해서 촬영이 중단되기도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다. 상업영화 제작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도 고충의 하나였을 것 같다. 촬영이 중단됐을 때는 화가 먼저 났다. 하지만 시나리오도 고치고 촬영한 필름을 보면서 부족한 점을 찾다보니까 오히려 초심으로 돌아가 많은 도움이 됐다. 전에 에로비디오 만들면서 친구들과 ‘진정한 에로영화란 무엇인가’ 고민하고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는데, 잊고 있었던 거다. 그 아끼던 친구들이 곁에 없어서 많이 외롭고 힘이 들었다. 기껏해야 4, 5일 만에 영화를 완성하다가 몇 개월씩 촬영을 하는데, 감독만 혼자 여관방에 가두어두는 거다! 너무 외로워서 포스트잇에다가 사람한테 하고 싶은 말을 끼적이기도 하고(웃음), 연출부, 촬영부 막내들하고 배우들을 불러다가 촬영 전에 회의도 했다. 한명씩 한명씩 회의 나오는 사람이 줄어들더니 나중엔 아예 아무도 안 나왔다. (웃음) 감독은 작품하고만 씨름해야 한다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주위를 다독이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엔 무조건 잔인해지자 했는데, 잔인함도 나중엔 많이 걷어냈다. <맛있는 섹스…> 촬영과 조명감독은 모두 광고하던 시절 만났던 친구들이다. 촬영이 중단되고 제작기간이 길어지면서, 촬영감독 최선묵은 다음 계약 때문에 현장을 떠나야 했다. 그에게 돌아올 때까지 자리 비워놓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최선묵이 빠진 부분은 내가 직접 찍었다. 워낙 6mm카메라를 직접 들고 찍었었으니까. 그런데 필름카메라는 너무 무겁더라.(웃음) 찍으면서 내가 뭐하고 있나, 6mm를 찍을 때 자유롭던 내가 한번에 돌릴 수 있는 필름 400자라는 한계에 갇혀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카메라를 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다. 촬영이 끝나갈 무렵 친구들이 떠나서 마치 눈과 귀가 없어진 것 같았다.

배우들과 의견을 맞추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특히 여배우인 김서형은 이 영화 때문에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김서형과 김성수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두 배우 모두 적극적이고 용감했는데.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하도 많은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 순간 섹스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그리고 그뒤엔 배우들이 감독의 섹스관을 이해하는 과정만 남아 있었다. 서로 진심을 털어놓은 마당에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서형은 에로배우처럼 생기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강해 보이고 도발적이었다. 여러 번 만나다 보니 그것말고도 여러 가지 얼굴이 있어서 신아에게 그런 점을 녹여냈다. 김서형이 신아를 만든 거다. 김성수는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한번 더 보자고 했는데, 그땐 오히려 기억에 안 남는 그 얼굴이 굉장히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하게도 베드신을 원신 원컷으로 찍는 바람에 침대에서 한바탕 뒹굴고 나면 김성수 몸에 한 보디메이크업이 몽땅 지워졌다. 예쁘게 못 찍어줘서 지금도 미안하다.

처음 시나리오보단 완성된 영화가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동기와 신아가 오럴섹스와 애널섹스를 두고 다투는 장면이나 공중화장실에서 섹스하는 문제를 두고 싸우는 부분은 공감할 만하다. 경험인가. 나는 뜨거운 사랑도 해봤고 밋밋한 사랑도 해봤다. 여자를 잘 안다고 자부할 순 없지만, 그런 것 같다. 남자는 섹스, 여자는 사랑. 또 남자들은 성기만 가져도 될 것을 전체를 가지려 한다. 만약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무인도에서 평생을 보낸다면, 남자는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십년이 지나서 남자가 바로 옆마을에 여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치자. 남자는 땅을 치고 통곡할 거다. 남자란 그런 존재다. 그리고 그런 남자들 때문에 여자들은 맛있는 섹스를 하고 맛없는 사랑을 한다. 정말 솔직한 사랑이란 뭘까. 나는 잠시 잠깐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남자들에게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한다는 환상을 일깨우기 때문에 쓸쓸하고, 여자들에겐 사랑의 판타지를 부수기 때문에 슬프다. 나는 어떠냐고? 지금 동거하고 있는 여자친구와는 뜨거운 사랑은 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절제하자고. 그래서 미지근하지만 생명력이 길다. 몇년을 만나고서도 마주앉아 있으면 처음 보는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을 아는가.

광고일을 한 적도 있고, 충무로에서 조감독을 한 적도 있다. 이젠 다른 영화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건방지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보고 싶은 영화가 없어서 에로영화를 만든다. 요즘은 잔혹한 영화나 포복절도하는 코미디영화가 대부분이다. 슬픈 시절인데 왜 그런 영화만 보고 살아야 하나. 난 아직도 에로티시즘이 뭔지, 섹스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내가 만드는 영화는 보여주고 싶은 영화가 아니라 보고 싶은 영화다. 나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참 좋아한다. 슬픈 코미디다. 인생은 어차피 슬픈 거다. 사람들은 슬픔을 덜어내려 애쓰지만, 아직 준비도 안 돼 있는데 슬픔이 찾아오기 때문에, 더욱 슬프다. 그래서 내 영화는 항상 비극이다. 하지만 한 사람과 파트너로 함께하면서 성에 대한 느낌과 경험을 쌓아가면 계속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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