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세 얼굴을 가진 사나이,<청풍명월>로 돌아온 조재현
2003-07-16
글 : 문석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프 롤 로 그

조재현이라는 이름이 뿜어내는 향기는 독특하다. 피와 땀이 범벅된 듯한 이 야성의 살내음은 조재현을 다른 배우들과 구별하게 하는 징표다. <악어>부터 <나쁜 남자>까지 김기덕 감독 영화나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내 안에 부는 바람>(내 안에 우는 바람???) 등 저예산 작가영화에서 진동했던 그의 냄새는 TV드라마 속의 상반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쇄되지 않는다.

<청풍명월>에서 풍기는 향기 또한 영락없이 그의 것인 듯 느껴진다. 인조반정이라는 역사의 급류 속에서 우정과 대의, 그리고 자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규엽 또한 거친 향을 발산한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나름의 사연이 있고 굴곡이 많은 규엽쪽이 인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기꺼이 선택은 했지만 처음 접하는 정통 무협 액션영화이다 보니 숱한 어려움이 있었다. 3개월간 승마와 검술을 익히고 체력 특훈도 했건만, 그늘도 없는 뙤약볕 아래서 20kg이 넘는 갑옷을 걸치고 10kg짜리 칼을 휘두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양수리촬영소 운당의 아찔한 기와지붕을 뛰어다니는 일이나 칼싸움 과정에서 손이 해질 정도로 부상을 입은 것, 수일 동안 벌어진 수중촬영 또한 만만치 않았다. 워낙 스케일도 크고 액션장면에 공을 들이다보니 “한신을 찍는 데 평균 3∼4일 정도, 어떤 경우는 10일 정도” 걸렸고, 60억원에 달하는 순제작비를 조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아 촬영이 중단된 적도 여러 차례였다.

하지만 조재현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체력의 한계나 늘어지는 촬영기간이 아니었다. “돈없이 몸으로 때우는 일은 계속 해왔던 것이고, 더위야 참으면 되니 견디려면 견딜 수 있지만 가장 큰 걱정은 촬영이 자주 중단되다보니 감정의 흐름이 잘 이어질까 하는 것이었다.” 액션에서도 그는 감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칼의 움직임 자체보다는 정서의 흐름을 담아 칼 놀림을 하는 게 중요했다.” 그는 액션장면마다 나름의 컨셉을 부여하고 이를 철저히 연구했다. ‘잔인함’으로 컨셉을 설정했던 첫 장면의 검술 액션이 생동하는 것은 감정과 동작이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청풍명월> 속 조재현의 느낌은 이전의 그것과 미묘하게 다르다. 강렬한 야성이 느껴진다는 데선 매한가지지만, 이전보다 세련되고 화려해진 것 같다. 향수 몇 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그 차이는 이 영화가 엄청난 자본이 투입된 초대형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생긴 게 아니다. 오히려 변화는 그 자신 안에서 일어난 것 같다. 7월13일 크랭크인하는 코미디 <목포는 항구다>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것 또한 그런 변화의 결과물로 보인다. <청풍명월>을 기점으로 이제껏 접할 수 없었던 세명의 ‘또 다른 조재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상업적인 배우 조재현 나는 철저하게 상업적인 배우가 되고 싶다. 그동안 저예산영화에 출연하다보니 제작비가 많고 시간도 많이 들이는 영화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청풍명월>에 출연한 것도 그런 차원이다. 옷을 바꿔 입고 싶었달까. 그동안 작업복을 입었다면, 지금은 맞춤옷, 명품옷을 입은 셈이다. 한국영화가 산업적 기반을 닦는 단계에 나 또한 영화를 상승시켜주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일단 그런 자리를 굳힌 다음에 다시 저예산영화도 넘나들고 싶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를 ‘김기덕의 페르소나’라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내 의지와 무관하게 그렇게 굳어져 가는 것 같았다.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면도 있었다. 물론 김기덕 감독이 내게서 새로운 면을 뽑아내준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함께 작업할 거지만.

자유로운 배우 조재현 나는 자유로운 배우가 되고 싶다.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연극도 자유로이 넘나들 거다. 최근의 <눈사람>까지 내가 방송에 자주 나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드라마를 통해 대중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중성을 얻었는데, 이젠 영화만 하겠다고 한다? 내게 이건 기회주의 같다. 또 내년에는 꼭 <에쿠스>로 연극무대에 오를 거다. 백상예술대상을 받게 한 연극이라는 의미보다는 나로 하여금 다시 배우의 길을 걷도록 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연기한 27살 때, 나는 레스토랑을 경영하면서 그냥 아저씨가 되어가고 있었다. 몸도 불어나고 얼굴, 그리고 정신도 무뎌지고 있었다. 그때 예리하고 솜털처럼 가벼운 정서의 17살 소년 앨런 역을 몸으로 표현하다보니 자연 얼굴, 몸, 정신에 날이 섰고, 자극이 됐다. 이제 내 나이 마흔을 바라본다. 더 늦기 전에 꼭 다시 해보고 싶다.

사실, 내가 자유로운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여러 분야를 넘나들겠다는 외형적인 차원만을 가리킨 건 아니다. 그보다는 실패와 성공에 연연하지 않고 무엇을 하든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가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는 거다. 그래서 배우의 길을 마감하는 순간, ‘저 배우가 걸어온 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항상 도전하고 호기심 많아했던 배우였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프로듀서 조재현 나는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 배우는 내 머릿속의 것을 실현한다기보다는 주어진 시나리오를 선택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다. 한번쯤은 내 것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제작이나 연출은 못하겠지만, 그동안의 배우 활동을 통해 프로듀서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구상 중인 작품은 교통사고를 당해 실의에 빠진 남자와 여성음악치료사의 진실된 사랑을 그린 멜로영화다. 그러니까 ‘잘 나가던 남자가 모든 것을 다 잃고 결국 사랑 하나를 얻는다’는 거다. 내가 주연도 맡을 생각이다. 아마 내년 후반쯤 구체화될 거다.

에 필 로 그

세명의 조재현, 또는 기존의 그를 포함해 네명의 조재현은, 이제 고정관념을 작파하고 성큼성큼 새로운 영역을 향해 발걸음을 내뻗을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식으로 말하면, 그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다른 얼굴로 만나더라도 가끔씩 옅어지거나 더 짙어질지언정 특유의 원초적인 향기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펄떡거리는 야성의 심장이 존재하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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