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호러영화 속 괴물들 - 스티븐 슈나이더의 강연
2003-07-24
정리 : 김혜리

이 글은 지난 7월16일 제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메가토크 행사에서 김소영 영상원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영화학자 스티븐 슈나이더의 강연을 글로 옮긴 것입니다. 스티븐 슈나이더는 하버드대와 뉴욕대학 티시예술대에서 철학과 영화학 박사과정에 있으며 <공포의 디자인: 영화적 공포의 미학> <뉴 할리우드의 폭력> <호러영화와 심리분석> 등의 책을 쓰고 엮었습니다.

괴물 = 일그러진 예술품

나는 호러영화의 역사 속에서 살인을 예술과 동일시하는 시선을 본다. 이 시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독일 표현주의 공포영화나 <오페라의 유령>(1925), <프랑켄슈타인>(1931) 등 수많은 고전기 호러무비는, 괴물이라는 존재를 더럽혀지고 망가진, 실패한 예술 작품과 동일시하는 관점을 보여준다. 뿌리를 더듬으면 문학작품에서 영감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이같은 비유법은, 영화에 이르러 더욱 생생하게 재현됐다. 예컨대 제임스 웨일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에서 과학자 헨리(콜린 크라이브>는 자신의 피조물이 기능적으로 미흡해서가 아니라 흉측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내쳐버린다. <오페라의 유령>(1925)에서 무성시대 스타 론 채니는 끔찍한 메이크업과 안면근육 연기를 최대한 활용한다. 괴물은 연민의 여지가 없거나 사악해서가 아니라 못생겼기 때문에 괴물이다! 요즘 같으면 참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태도다. 1913년, 1916년, 1945년 세 차례에 걸쳐 영화화된 오스카 와일드 원작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 캐릭터의 도덕적 타락은 점점 황폐해지는 자화상을 통해 이미지로 옮겨진다. 벗겨진 뾰족한 두상, 쥐를 연상시키는 몸매를 가진 <노스페라투>(1922)의 올록 백작은 몽환적인 촬영이나 미장센과 대조를 이루면서 더욱 끔찍한 인상을 남긴다. 그들은 제대로 만들어진- 고전적인 미의 균형을 성취한- 예술품이나 아름다운 환경과 극명한 명암을 이루는 실패한 예술품이다. 이 계보의 ‘돌연변이’ 후예는 로저 코먼의 에드거 앨런 포 원작을 각색한 영화나 타르셈 싱의 신표현주의 연쇄살인극 <더 셀>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영화 속에서 악당은 조상들처럼 기형의 외모로 고통받지는 않지만 고도로 인공적이거나 과잉하게 장식된 의상, 세트, 연기 스타일은 뒤틀린 자아의 내적 움직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요컨대 고전호러에서 괴물의 정의는 도덕, 정신, 철학이 아니라 미학적 기준으로 작동한다. 킹콩이나 늑대인간, 미라는 어느 정도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을 미워하고 사냥하는 인간들의 동기는 주로 불합리한 공포나 혐오감이다. 그러나 아무리 내면이 아름답고 덕성스러워도 이들은 그들의 영화적 공간 안에서 어쩔 수 없는 괴물로 묘사된다. 이는 예술품을 해석하기 곤란하거나 부조화스런 대상이라기보다 아름다움의 문제로 파악하게 만드는 주류 예술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체=예술적 오브제

모던호러영화의 기점은 1960년 나란히 만들어진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와 마이클 파웰의 <피핑 톰>이다. 더이상 ‘괴물’은 노골적인 육체적 코드로 조합된 존재가 아니다. 앤서니 퍼킨스와 마크 로스는 지극히, 지나치게 인간적이며 사실적이다. 그들은 표현주의적으로 다듬어진 악당의 코드를 갖고 있지 않아 관객/주인공/희생자가 즉각 알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리얼하다. 이들은 잘못 만든 예술품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기술을 사악한 목적에 이용하는 타락한 예술가다. 현대 예술과 아방가르드 예술이 대중화되면서 예술에 관한 일반의 이해가 1950, 1960년대에 근본적 변화를 맞았고 더욱 복잡한 문제를 떠안게 된 사실을 이 대목에서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부터 예술은 쇼크, 규범의 위배, 공격성, 부조화의 개념과 깊이 연루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살인자=타락한 예술가’의 공식에 입각한 모던호러영화는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살인을 예술적으로 생산된 결과물로 보는 부류고 두 번째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 자체를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조명하는 경우다. 살인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묘사하는 영화들은 다시 ‘실용파’와 ‘상징파’로 나뉜다. 전자는 말 그대로 살인의 전리품을 실용적 목적으로 재활용하는 영화로 카니발리즘영화가 대표적이다. 피살자의 살을 육포로 만들어 고수익을 올린 유기농 농부가 나오는 <모텔 헬>(1980)이나 도살자들이 텍사스-오클라호마 칠리 콘테스트에서 ‘재료’ 덕에 우승하는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2>(1986)다. 목적이 실용적이긴 하지만 여기서도 살인자는 예술가적 측면을 과시한다.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의 가죽가면이나 인골로 만든 가구는 영화 속에서는 예술적 오브제로 취급되지 않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쇼크보다 좀더 복잡한 반응을 이끌어낼 만한 숙련된 솜씨로 만들어진 물건들이다. <양들의 침묵>(1991)도 마찬가지다. 한니발 렉터는 탈옥을 위해 간수의 얼굴 피부를 벗겨 가면을 만들고 문제의 연쇄살인광은 희생자의 가죽을 재단해 옷을 짓는다. 한편 살인을 예술품처럼 그리는 영화의 두 번째 그룹은, 시신을 조심스럽게 배열하고 조작해 상징적 의미를 만들어내고 본인의 의지를 온 세상에 선포하는 살인자의 영화다. 희생자의 피를 페인트삼아 그림을 그리는 <핏빛으로 칠해줘요>(1965)나 별 볼일없던 조각가가 시체를 주조해 작품을 만들면서 각광받는 이야기를 담은 로저 코먼의 <피의 양동이>(1959)가 이 분류에 해당된다. <쎄븐>에서도 살인자의 현존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해석해야 할 대상은 그가 만들어놓고 간 살인의 현장이다. 여기서 경찰은,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은 마치 예술비평가처럼 살인이라는 작품을 품평하고 해석해야 한다. <맨헌터>에서도 살인자는 마치 현대의 예술가들처럼 작품 뒤로 사라져버린다. <할로윈>(1979)에도 눈여겨볼 장면이 있다. 살인마 마이클 마이어스는 일련의 살인을 치른 뒤, 로리(제이미 리 커티스)를 위한 깜짝쇼를 준비한다. 2층에 있는 친구 애니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로리는 팔벌리고 거꾸로 매달린 애니의 시체와 마이클의 죽은 누이 주디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본다. 이 장면은 문자 그대로 감상의 대상으로 주목받기 위해 아우성치고 있다. 세심한 디스플레이도 모자랐는지 존 카펜터의 카메라는 재프레임을 하는가 하면 느린 줌을 쓴다. 심지어 영화 속 로리도 당장 도망치는 대신, 한번 더 참혹한 현장을 자세히 보려든다. 표현주의 화가의 화려한 팔레트나 다름없는 도입부의 잔혹한 이중 살인장면이 강력하게 감독의 비전을 전달하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는 문제의 살인예술가가 극중의 킬러인지 카메라 뒤의 감독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살인=퍼포먼스 예술

살인을 일종의 예술적 퍼포먼스로 연출한 영화에는 <스크림>이나 <어반 레전드>류의 이른바 슬래셔영화가 있다. 슬래셔는 거의 코미디에 가까운 매너로 어떻게 하면 정해진 희생자들을 더 기막히게, 창의적으로 죽일 것인가 궁리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인다. 누구를 죽이느냐보다 어떻게 죽이느냐가 문제다. 여기서 폭력을 예술적인 무엇으로 만드는 요소는 희생자 시체의 창조적 이용이나 디스플레이가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살인자가 구경꾼으로부터 얼마간 미학적인 반응을 기대해마지 않으면서 발휘하는 독창성과 쇼맨십이다. 특히 네오 슬래셔 장르에서 어느 영화에 등장하건 별 상관없는 남녀 인물들은- 그들의 감독과 더불어- 박스 오피스 수입과 속편의 숫자를 부상으로 걸고 누가누가 더 놀랍게 죽이나 경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괴물’을 타락한 예술가로 보는 관점 중 최고로 흥미로운 부류는 슬래셔나 스플래터와는 다른 식으로 살인을 퍼포먼스로 만든 영화들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1971)는 호러 장르의 영토에서 보면 변두리에 있는 영화지만 알렉스가 힘없는 노인의 몸을 <싱잉 인 더 레인>을 부르며 짓밟는 장면은 어떤 하드코어슬래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한 뒤틀리고 가학적인 쾌감에 기초한다. <양들의 침묵>의 한 장면도 언급할 만하다. 한니발 렉터가 두 간수를 해치고 탈옥하는 장면은 행위예술에 가깝다. 렉터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테이프를 틀고 간수가 채운 수갑을 빼는 데에 성공한다. 화면 안 음악이 크레센도 악상기호를 타고 점점 커지는 동안 렉터는 한 간수를 결박하고 다른 간수의 뺨에서 살점을 뜯어낸다. 그리고 묶어놓은 간수의 머리를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손짓으로 반복해서 내리친다. 2구의 시체를 만든 렉터는 테이프 플레이어 앞에 서서 조용히 음악에 맞추어 손을 젓는다. 이 장면은 영화학자 조엘 블랙이 쓴 한 구절에 들어맞는다. “인간의 어떤 행동이 숭고미를 경험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건 아마 살인일 것이다… 만약 살인이 미학적으로 체험될 수 있다면 살인자는 창조가 아니라 파괴를 전문으로 하는 일종의 퍼포먼스 예술가나 반(反)예술가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현대 호러영화로부터 다른 모든 현대 예술 혹은 포스트모던 예술이 그렇듯 미학의 영역과 윤리적 영역을 분리시키는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이는 어떤 대상이 아름답기 위해 도덕적으로 올바를 필요는 없다는 입장과 궤를 같이하는 사고다. 최근의 수많은 호러와 스릴러에서 탐정과 킬러 사이에는 미묘한 상호 이해와 공감이 흐르며 영화 속 추적자는- 그리고 그에게 정서적으로 동화된 관객도- 살인자의 행위를 예술 작품을 품평하듯 감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호러영화는 예술적 형식을 통해 우리 안의 어둡고 억눌린 이면과 (안전하게) 접촉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왔다. 나는 살인자를 실패한 예술품으로 보는 클래식 호러의 관점과 살인자를 예술적 주체로 보는 현대 호러의 경향을 비교했다. ‘살인자=예술가 탐정/관객=예술비평가’의 도식 다음으로 제3의 국면이 도래한다면, 토론에서 김소영 교수가 제기한 대로 스스로 예술가이자 예술비평가인- 한니발 렉터와 같은- 살인자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또 한 참석자가 질문한 대로 어떻게 죽이느냐의 문제만큼 누구를 죽이느냐, 즉 희생자의 역할이 ‘예술로서의 살인’을 묘사하는 데 좀더 중요한 기능을 맡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살인자를 타락한 예술가로 비유하고 그럼으로써 살인을 로맨틱하게 그리는 호러 장르의 메타포가 주 소비층인 젊은 관객에게 악영향을 준다는 주장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물론 방대한 경험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문제지만 한 실증적 연구는, 영화관람 뒤의 공격성향은 몇 가지 텍스트적 특징이 따를 때에만 현저히 증가한다고 밝히고 있다. 극중 피해자의 특성이 주변의 표적과 일치할 때나 영화 속 폭력이 보상받을 때, 영화가 폭력을 모욕에 대한 정당한 대응으로 그릴 때, 영화 속에서 희생자의 고통이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전달되지 않을 때가 그 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우려한다면 호러 장르 자체보다 장르와 무관한 영화의 특정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합리적이다. 호러영화의 ‘살인자=예술가’ 메타포는 미학과 윤리를 분리시키는 마지막 칼을 내리쳤는지 몰라도 그것의 사회적 효과에 대한 비판은 항상 특정한 내러티브나 영화형식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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