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똥개> 곽경택 감독의 반성과 결의 그리고 한계
2003-07-31
글 : 김종연 (영화평론가)

킬리만자로의 똥개

엄지원이 예뻤다. 극장 문을 나서면서 개인적으로 들었던 첫 감상 또는 의혹이다. 이런 개인적인 감흥은 만일 이 영화가 곽경택 감독의 연출작이 아니었다면 이 지면을 빌려 사사로이 적는 팬레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의 김보경이나 <챔피언>의 채민서의 경우에서도 그랬듯이 상대적으로 무명이거나 신인인 여배우 한 사람의 (영화 내 비중에 상관없이) 매력만으로 영화 전체에 탄력을 불어넣도록 했던 곽경택 감독의 전력을 고려한다면 그 감흥은 다소 석연치 않은 ‘착시현상’이라고 해야겠다.

한마디로 그들은 곽경택 영화 속에서 ‘훨씬 예뻐 보인다’. 그 비밀은 영화 속에서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이 실은 남자들의 시선 속에서만 존재하는 종류라는 데 있다. 하여 그들은 아무리 우스꽝스러운 복색에 촌스러운 행색에도 아름답기만 하다. <친구>의 김보경은 남자들의 관음적 시선에 충실하고 <챔피언>의 채민서는 현모양처형의 ‘참하고 순수한’ 여인네를 동경하는 남자들의 가부장적 판타지에 부합한다. 이것은 <똥개>의 엄지원도 어느 정도는 피해갈 수 없는지라 기어코 피투성이가 되어 경찰서를 나오는 남자를 기다리는 자리로 불려오고야 만다.

남성 판타지

이 ‘시선’의 특징은 80년대가 아닌 200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똥개>가 분위기도 비장하지 않으며 남자들이 ‘가오’잡지도 않는데 왜 여전히 구조적으로는 ‘남자영화’인지 또는 마초적인지에 대한 단적인 근거다. <친구>처럼 눈에 힘주지도 않고 <챔피언>에서처럼 강철 같은 근육은 없으나 나름의 방식으로서의 남자다움이 <똥개>에서 중요한 동력이 되는 탓이다. 그것은 ‘나’라는 소우주의 ‘영웅’이 만들어져가는, 고독한 자기만의 ‘신화’(내러티브)를 쓰는 일에 비할 수 있다. 그 도정에, 여자들을 포함해 모든 것은 <은하철도 999>의 마지막 대사처럼 기본적으로 ‘청춘의 환상’같은 것일 뿐이다. ‘그 시선’은 완화되거나 교정되긴 했어도 이 영화에서 여전하다. 그 시선은 바로 주변의 모든 것들을 자신의 ‘영웅전설’ 책 속에 집어넣으며 스스로를 “눈 덮인 킬리만자로에서 얼어죽는 표범”쯤으로 만든다.

그러나 한편 <똥개>는 확실히 다른 태도로 만들어진 영화다. 일례로 영화에는 밀양의 악덕 부동산업자 만덕이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느끼한 목소리로 만덕이 노래 앞 가사를 비감해할수록 고무되었던 좌중은 썰렁해지고 카메라는 노래 가사에 놀라기라도 한 듯 얼른 지붕으로 올라가 모두를 소외시킨다.

이 뜬금없는 장면은 <친구>에서 유오성이 <마이웨이>를 열창하던 장면을 야유하듯 비튼 것이다. 이 내부자적인 유머는 아마도 “어깨에 힘을 뺐다”는 곽경택 감독이 스스로에게 거는 독한 농담처럼 보인다. 마치 데칼코마니로 찍어낸 듯 <친구>와 닮은 <똥개>가 실은 얼마나 다른 영화인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챔피언>의 고전 이후, <똥개>가 <친구>를 떠올리는 구도로 되돌아간 부분은 분명히 있다. 특히 어머니를 일찍 잃고 왜곡된 아버지상(father figure)를 가진 (사소하든 거창하든) ‘영웅’스토리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똥개>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스스로를 추켜세우기 전에 <똥개>라고 아예 못을 박는 또 하나의 시선을 추가적으로 갖고 있다. 이것은 자기도취적인 태도를 껄끄럽게 인식하는 일종의 자의식이다. 철민의 ‘자아신화’를 완성하는 결투가 결국 동네 ‘개싸움’처럼 묘사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곽경택 감독에게 <똥개>의 의의는 유오성과의 불화 이후 새로운 페르소나, 정우성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오는 것 같다. 거친 유오성은 매끈하게 다듬어 들여보내고 꽃스러운 정우성은 고의적으로 훼손하는 정도의 태도적 다름을 보여주기는 해도 결국 그가 의도하는 ‘페르소나’가 기본적으로 ‘인간미 넘치는 경상도 사나이’라는 점에선 같고 이 부분이 잘 살아나느냐 못 살아나느냐가 늘 그의 영화 성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다.

곽경택 감독은 <억수탕>에서 보여준 것처럼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며 한숏에 밀어넣는 탁월한 재능이 있다. <챔피언>의 복싱 특설 링이라던가 조성모의 뮤직비디오에서 보듯 단일한 시간과 공간에서 상당히 많은 인물들을 제한된 캔버스에다가 가뿐히 밀어넣는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대형영화 연출가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타이타닉>에서 제임스 카메론이 전투 지휘하듯 보여준 것과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로버트 알트먼이나 폴 토머스 앤더슨이 보여준 재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드라마틱한 얼굴들을 연출해 내기보다 오히려 심드렁하게 두런두런 진행되는 일상의 얼굴들을 포착하려는 데 더 깊은 관심을 갖는다.

<친구>나 <챔피언>에서처럼 남성판타지에 중독된 듯 보이는 그 순간에도 곽경택 감독이 삶의 소소하고 핍진한 영역을 보여주는 방식은 반면 환상이나 거품이 전혀 없어서 때때로 자연주의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정애와 철민이 스쿠터 추격전을 벌일 때나 발견되는 퀴퀴한 시장 어귀와 골목의 미로와 같은 공간들은 그런 자연주의적인 관찰력과 세심함이 없었다면 새로운 공간으로 생령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잘 눈길을 주지 않는 폐차장, 좁은 다리, 공터 앞마당 등도 그에게는 그다지 살풍경하거나 가난, 슬픔 등의 페이소스 등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복고적 감상주의

<나쁜 영화>나 <눈물>이 청소년들의 성행위를 약간은 문제적 화두처럼 앞에 두고 위악적으로 혹은 동정적으로 인상쓰고 있을 때 대한민국의 가장 대중적인 감독인 곽경택은 정작 <똥개>에서 철민이 ‘똥개’를 잃고 분노에 미쳐 있을 때 벗은 여자 옆에서 몸을 일으키는 진묵이 고등학생이라는 것에도 별 느낌없이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위선이든 위악이든,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풍속이나 모럴에 대해서 옹호하지도 비판적이지도 않은 너그러운 관찰자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친구>의 서태화처럼.

이 모든 것들은 감독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핍진한 것들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한다.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친구>에서의 그 소소한 기억력이 없었다면 <친구>는 그저 그런 깡패영화, ‘후까시’ 잡는 남자영화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예 온갖 80년대의 디테일을 안고 거대한 ‘기시감’으로 돌아와 경상도 사투리 신드롬을 자아내기까지 한 이 영화에서 사실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부산’이라는 공간적 위치나 80년대에 대한 향수조차 그 ‘사소함’,‘지나버린 것’, 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그의 애정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소한 소품에 집착하면서 사적 체험의 장으로서의 80년대를 추억하는 다른 아류영화들이 이룩할 수 없었던 진정성이다. 그렇게 하여 그의 복고적 감상주의는 버려졌던 데데한 것들과 결부되어 돌아오며 ‘한방’을 날린다.

따라서 <똥개>에서 철민과 정애가 나누는 황홀한 교감의 ‘한방’도 철민이 ‘사실 지더러 내가 뭐라 할 처지가 되느냐 말이다’하고 입 다물고 커피 배달 가는 정애의 스쿠터에 뚱하니 동승하는 그 순간에 온다. 그것은 돈도, 미모도, 권력도, 멋도 모두 다 일류가 가져간 뒤 남겨진 주변부 진창에서만 들려오는 감각적 로맨스다. 곽경택 감독은 처음부터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흥행감독으로서 그는 이 ‘작은 것’, ‘지역적인 것’, ‘특수한 것’들을 꿰어 보편적인 공감을 얻어내기 위한 내러티브와 이야기꾼을 필요로 한다. 그가 다양한 일상의 디테일들은 자연주의적인 관찰로 길어내면서도 결국 신파적이거나 감상적일 위험을 무릅쓰고 흥행의 성패를 ‘페르소나’에 기대는 이유다. 유오성이 그 자리를 채워 성공한 <친구>의 소소한 이야기들은 신화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국지적인 것들이 보편적 패턴을 갖고 올라서는 것이다.

곽경택 감독의 위태로움은 이 ‘신화적인 것’과 ‘국지적인 것들’ 사이에서 나타난다. 버려지고 외면당하던 것들에 대한 애정이 곽경택 영화의 감상이나 복고에 살과 피를 입혀주긴 했으나 그 이야기는 결국 ‘국외자’의 것은 아니다. 덜 ‘일류’인 ‘이류’가 삼류나 밑바닥을 바라보는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서울에 비해서야 지방이지만 여전히 대도시인 부산, 진정한 ‘악당’들인 정치가나 악덕기업가에 비해선 잔챙이에 불과해 보여도 악당이간 마찬가지인 깡패들, 못나긴 했어도 어쨌든 여자가 아닌 남자의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곳엔 ‘압도적인 1등’의 존재를 통해 면죄부를 발부받는 ‘위험한 정신의 고백’이 들어 있다.

신화적 또는 국지적

따라서 <챔피언>의 실패는 사실 그 페르소나인 유오성의 ‘신화적인 것’이 너무 비대해져버린 데 책임이 있다. 신화의 기운을 뿜는 유오성의 카리스마는 갑자기 곽경택 감독이 소중히 빚어넣은 모든 디테일들을 모두 다 빨아먹는 블랙홀이 되어버렸다. <똥개>를 통해 드러난 곽 감독의 반성과 결의는 이런 것들에 대한 자기 검열이며 그 해결책으로 그가 채택한 방식이 ‘낮은 데로 임하기’이다. 부산이라는 대도시에서 밀양이라는 소도시로 옮긴 것도 ‘조폭’이 아닌 ‘백수’의 이야기로 옮겨간 것도 그 일환이다. 필연적으로 아주 망가져도 존재감 나는 꽃미남 배우 ‘정우성’을 맞아들여야 했던 이유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적 비극의 조명을 받고 쓸쓸히 고독 속으로 퇴장하던 <친구>의 아버지는 계란 프라이 하나를 더 먹겠다고 눈을 부릅뜨는 철민의 아버지로 바뀌고 남자들의 시선 속에서만 존재할 것만 같았던 <친구>와 <챔피언>의 여자들과 달리 <똥개>의 정애는 ‘감히’ 영화 전체의 내레이터인 철민을 촌평하기도 하고 냉연한 관찰자로서 그가 써가는 자기만의 ‘신화 쓰기’에 주석을 달기도 하는 것이다(“내를 보여줄끼다.”/ “아버지한테?”).

그러나 여전히 곽경택 감독은 감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화 쓰기’를 멈추지 못한다. <똥개>는 차라리 위태로운 균형이다. 반 15등의 이야기에서 30등의 이야기로 하향 조정했다고는 하나 현재 분명 ‘거기 있는’ 밀양은 너무나도 아련하고 빛바랜 노스탤지어에 파묻힌다. 따라서, 고독한 늑대나 하이에나, 표범은 아닐지 몰라도 곽 감독은 여전히 시선에서만큼은 ‘킬리만자로의 똥개’다. 그것은 ‘나는 거들먹거리지 않는다’는 것을 거들먹거리는 또 다른 마초의 얼굴일 수도 있다. 그가 신화를 빌리지 않고 ‘국지적’인 것들만의 힘찬 드라마를 쓰기에는 ‘억수탕’의 트라우마가 너무 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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