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영상자료원장 이효인
2003-08-11
글 : 문석
사진 : 정진환
필름수집소 아닌 본격 영상아카이브로 거듭난다

이효인씨가 지난 7월28일 한국영상자료원장에 취임한 건 참여정부 시대에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수많은 과거의 운동권 인사들이 청와대와 정부에서 활약하고 있는 마당에 ‘재야인사’ 또는 ‘영화운동가’라는 이미지가 강한 그가 정부의 산하기관장이 됐다는 사실이 뭐 대단한 일이겠나. 아닌 게 아니라 그가 걸어온 길은 외곬이라 할 만하다. 대학 시절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의 세계에 눈뜬 이후, 서울영화집단에 들어가 1986년 홍기선 감독과 함께 농촌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린 <파랑새>를 만들어 영화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영화평론가 이정하, 이수정 프로듀서, 구성주, 이상인, 김응수 감독, 김재호 촬영감독 등과 함께 민족영화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영화와 현실을 고민했던 그는 90년대 중반 들어선 독립영화계의 맏형 노릇을 톡톡히 수행해왔다(한때 ‘영화운동을 잘하기 위해선 현장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정지영 감독의 연출부(<여자가 숨은 숲>)로, 지미필름 기획실 직원으로 ‘외도’한 적도 있지만).

이러한 이효인씨가 영상자료원의 원장으로 부임한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정부뿐 아니라 영화계 내에서조차 음지로 자리잡아온 영상자료원은 부족한 예산과 인원이라는 한계 속에서 다소 부실한 운영을 해왔다. 필름의 보존이라는 일차적 기능 외에는 필름 아카이브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는 얘기. 개혁 성향이 강한 이효인씨가 이 조직의 선장으로 임명된 것은 영상자료원의 획기적인 변화를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영상자료원 개혁의 구심이 될 이효인씨를 임명된 지 사흘째 되는 7월30일 오후 서초동 예술의전당 안에 자리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영상자료원장에 취임했다. 첫 느낌이 어떤가. 생각보다 해야 할 일이 많다. 임명된 날인 7월28일 잠시 들렀었고, 다음날부터 사흘 동안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사실 영상자료원이 외부로부터 잘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별로 없는데, 그동안은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업무보고, 술자리, 회의 이런 데서 직원들과 대화를 해보니 기회만 주면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더라.

영상자료원장 공모에 응한 배경이 궁금하다. 만약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면 응모하지도 뽑히지도 않았을 거다. 그동안 한국 영화사를 연구한답시고 다녔지만 게으르고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지…. 나도 앞으로 연구 작업을 계속 하겠지만, 다른 유능한 연구자들이 이곳을 통해 내가 답답했던 부분, 해결하지 못했던 것들을 풀어내기를 바랐다. 영상자료원은 일종의 보물창고 아니냐. 여기를 잘 관리해서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또 그동안 이용자로서 느낀 점을 바꾸고 싶었다.

하긴, 한국 영화사 연구를 했으니 영상자료원은 자주 다녔을 것 같다. 이용자 때는 불만이 많았다. (웃음) 그래도 지금은 내가 많이 이용하던 때보다는 나아졌다. 예전엔 지하 경비실 같은 좁은 공간에 직원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었다. 그땐 <자유만세> 같은 영화를 상영하면 비디오카메라로 찍곤 했다. 당시 캠코더의 테이프 길이가 40분 정도밖에 안 되니 테이프 바꿔 끼운다고 법석을 떨었고, 그러다보니 중간중간 빠지는 장면도 있었다. 촬영을 제지하는 직원도 있었지만 눈감아주는 경우도 있었다. (웃음)

영상자료원의 조직개편을 생각하고 있나. 조직을 크게 흔드는 것은 우리 정서에도 안 맞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다만 조직의 편제가 현재의 종적인 형태에서 횡적인 형태로 바뀌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당분간 업무파악을 더하고 간부들과 논의해서 결정할 계획이다. 어쨌든 조직을 뒤엎는 것으로 이곳을 혁신할 생각은 없다. 사업을 갖고 혁신하자는 거다. 그리고 소위원회를 활성화할 생각이다. 현재 영화인 다큐멘터리 제작 소위원회가 있는데, 앞으로는 대외협력, 정책, 국제교류, 한국 영화사 연구, 기술 등 5개의 소위원회를 만들 생각이다.

그동안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지. 가장 큰 건 예산과 인원문제다. 밖에서는 프린트 1벌 뜨는 것, 영화를 디지털로 변환해 보존하는 것이 뭐 어렵냐고 하지만 문제는 그 예산이 없다는 거다. 지금 복원해야 할 게 흑백필름만 230편인데 편당 1천만원이라고 해도 23억원이 든다. 확보된 예산은 없고, 5개년 계획을 세워도 1년에 5억원꼴이 든다. 이창동 장관이 임명장을 주면서 그러더라. “그동안 영상자료원이 필름 보관 업무 같은 것은 훌륭하게 해왔지만 낯선 게 사실이다. 부디 생동감 있게 만들어달라.” 그러면서 “예산이 넉넉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문광부만 바라보고 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제부터 돈을 벌러 다녀야 하는 입장이다.

해결의 실마리들은 있나. 충분한 예산을 정부로부터 따내는 것은 한계가 있을 거다. 영진위, 방송영상산업진흥원과 협력을 강화하는 가운데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원은 현재 정규직 29명에 계약직 10명 해서 39명이다. 기획예산처의 기준대로라면 꽉 찬 거다. 하지만 사업별로 계약직을 채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업을 개발하고 외부와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

또 다른 당면한 과제들은 어떤 게 있나. 국립영상아카이브에 대한 준비, 저작권 문제 해결, 복원사업, 큐레이팅 기능 확보 등 숙원사업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국립영상아카이브의 전망은 어떤가. 원장에 응모할 때 사업계획서를 써낼 때만 해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와서 보니 복잡하고 어마어마한 문제더라. 대통령 공약사항인 국립영상아카이브는 외형적으로는 방송아카이브와의 통합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우리의 숙원사업이 모두 완성된 형태라고 보면 된다. 국가에서 책임지고 모든 영상자료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니. 우리와 영진위가 힘을 모아 주도적으로 준비하면 그리 머지않은 시기에 이룰 수 있으리라 본다.

많은 사람들이 연구인력 부재를 영상자료원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로 지적한다. 그렇다. 하지만 연구 그 자체보다는 큐레이팅 기능을 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영화사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다양한 행사를 효과적으로 개최하고, 기본 자료를 만들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하다. 계약직으로 고용할 수도 있을 것이고, 설립예정인 영상자료원 부설 한국 영화사 연구소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의 기획행사는 다소 형식적이었던 것 같다. 이런 행사들이 대중과 영상자료원을 가깝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건데, 연구기능이 없어 어려움이 많았다. 이제 한국영화도 어떻게 묶이느냐에 따라 큰 주목을 받을 수 있다. 1998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들이 베를린영화제에 나가서 주목을 받은 뒤 전세계를 돌았던 것처럼. 지금은 어떤 감독들의 어떤 영화를 어떤 주제로 묶느냐에 따라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좋은 ‘세트메뉴’가 많이 개발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 기획하고 실행할 연구인원이 있어야 한다.

명감독, 명배우 시리즈도 이미 예정이 잡혀 있으니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올해 프로그램은 그대로 갈 수밖에 없을 거다. 계획도 계획이지만, 예산이 지정돼 있기 때문에 섣불리 바꿀 수 없다. 그렇더라도 그동안의 행사와는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년부터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

저작권법 문제도 심각하다고 들었다. 지난해 영화 200여편을 화질 좋은 디지베타 테이프로 옮겼다. 그걸 VHS 테이프로 옮겨서 비치해놓기만 하면 연구자들이나 일반인들이 상시적으로 열람할 수 있어 좋을 텐데 저작권법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매체를 변환시키기 위해서는 저작권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돼 있고, 이를 열람하는 것도 어렵다. 영상자료원 안에서만 볼 수 있게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법 조항 개정을 추진 중이다.

자료수집도 부진한 것 같다. 아니다. 분명 성과가 있는데 그동안은 가시화가 어려웠다. 홍보하고 공개할 여력이 없는 거다. 최근 정홍택 전임 원장이 미국의 어느 가정집에서 소장 중인 한국영화 프린트 30편을 가져오기 위해 출장을 다녀왔다. 그중 9편은 한국에 프린트가 존재하지 않는 작품이다. 그런데도 잘 알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수집자료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단편영화뿐 아니라 예고편이나 광고 같은 자료도 수집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건 방송영상산업진흥원과 함께 보조를 맞춰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영화만 납본받는데 예고편이나 포스터 등 자료도 납본받는 식으로 제도를 바꿔야 할 것이다. 지금 시스템에서는 포스터만 구하려 해도 어렵다. 영화사에 가서 포스터 좀 달라고 하면 ‘개봉 전에 재수없게 웬 포스터’ 이런 반응이고, 개봉이 끝나고 가면 없다고 한다. 제작사들도 마인드를 바꿔야 한다. 이미 납본한 프린트를 DVD 제작한다고, 해외에 갖고 나간다고 빼가곤 한다. 어떤 감독은 자기 작품이 외국에 간다고 빼가서 새로 편집까지 했다. 자기 것이니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발상인데, 사실 이건 외국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가유산인데, 그래서 일종의 박물관에 놓은 건데 그런 걸 빼쓴다는 이야기니 말이다. 어쨌든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제작자들을 욕 한다고 해결되지도 않을 일이다. 우리가 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복원사업은 활발한가. 초라한 형편이다. 1년에 흑백 한편, 컬러 한편을 네거티브로 만드는 정도니까. 정말 ‘떡’이 된 필름을 제대로 복원하려면, 필름 복원이 국가가 적극적인 의지를 펼치는 정책사업이 돼야 한다. 디지털화도 추진해야 한다. 법적 정비를 해서 인터넷으로 영화 이미지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시네마테크협의회와의 관계는 좋아질 것 같다. 좀더 긴밀한 관계를 맺을 생각이다. 어제 김노경 사무국장과 김성욱 프로그래머를 만났다. 내가 그랬다. “예술만 너무 좋아하지 말자. 오락성도 좀 신경을 쓰자.” 그리고 한국영화 재발견 작업을 함께하자는 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박노식 영화제를 한다고 했을 때 영상자료원 시사실에서 하는 것과 시네마테크에서 하는 것이 다르다. 관심의 폭과 흥미가 달라질 거란 얘기다.

해외와의 교류는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실속 위주로 진행할 것이다. 우선 북한과 일본, 홍콩의 아카이브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것이다. 그쪽 자료를 활용해 다양한 행사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자유만세>가 나왔을 땐 일본에서 어떤 영화가 나왔나, 어떤 영화가 대박이었나, 이런 게 궁금하다. 그러려면 앞서 말했듯이 우리 영화를 잘 묶어내는 일 또한 중요하다.

아무튼 신임 원장에 대한 기대가 많은 것 같다. 솔직히 부담이다. 어떤 이는 축전에 “축하에 앞서 기대를 합니다”라 적기도 했다. 어쨌건 내게 능력이 있다면, 첫째는 한국 영화사를 공부한 거고, 둘째는 다른 이들에게 사기치는 놈은 아니라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라고 본다. 여러 가지 문제가 많겠지만 내가 나서서 풀고 그래야 할 것이다.

한국 영화사를 전공한 연구자로서 영상자료원에서 일하는 것은 일종의 축복이기도 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얼마 전 출간한 <영화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의 다음 이야기도 쓰고 싶다. 영상자료원에 있으니까 작업이 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과연 영화를 볼 수 있을까….

임기 3년 동안 ‘이것만은 해결하겠다’라고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글쎄…. 국립영상아카이브를 임기 내에 완성하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확실한 징검다리는 해야겠다는 정도다. 내가 할 일은 국립영상아카이브로 나아감에 있어 좀더 좋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영진위, 문예진흥원, 방송영상산업진흥원 등과 상시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테이블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교수직(경희대 아트퓨전디자인 대학원)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자리는 겸직을 할 수 없게 돼 있다. 휴직을 하거나 퇴직을 할 생각이다. 재밌는 게 산하 단체장이라고, 내가 고위공직자더라. 재산도 공개해야 한다. (웃음)

지금까지 가장 많은 월급을 받는 자리 아닌가. 부인이 좋아했을 것 같다. 가장 많이 벌게 된 것은 사실이다. 사실 월급이라고 해봐야 옛날 지미필름, <사회평론> 등에 있을 때와 1년 반 동안 교수를 하면서 받은 게 전부니까. 아내에게 고마운 게 있다면, 그동안 내 일에 관해서 한번도 개입하거나 반대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이번에도 특별히 좋아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최근은 쉬고 있지만 아내는 유능한 출판편집자다. 얼마 전까지 내가 얹혀살아온 셈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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