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도 하나의 놀이에요.” <남남 북녀>의 조인성
2003-08-18
글 : 심지현 (객원기자)
사진 : 이혜정

<남남북녀>를 찍으며 실컷 노는 흉내라도 냈으니 조금 분이 풀리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뜻밖에 싱긋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요즘엔 모든 게 자신에겐 놀잇거리란다. 배우가 영화 안에서 노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인터뷰도 하나의 놀이라나. 어째 측은지심 가운데 기특함이 밀려든다.

<별을 쏘다> 이후였을 거다. 노려보는 것만 같았던 카메라 불빛이 편해진 게, 입 안에서 깔끄럽게 맴돌던 대사가 리듬을 타기 시작한 게, 놀 줄 몰랐던 조인성이 까불게 된 게 말이다. <학교>라는 드라마를 찍을 때 주위에서 ‘건방진 녀석’이라고 수군댔지만, 사람들 앞에서 저절로 굳어지는 표정을 숨길 수 없던 그였다. 연출 PD에게도 조인성은 골치아픈 신인이었다. 대사와 연기톤이 튀는 걸 교정해주려 해도 말을 듣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한번 친해지면 허물없이 지내는 조인성은,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많이 드는 타입.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성격 덕분에 늘 구호와 성토가 마음속에 시끄럽게 이는 그가 사람을 경계하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별을 쏘다>를 만난 건, <마들렌> <클래식>을 차례로 거친 뒤였다. 대선배인 전도연과 호흡을 맞추며, 그는 대사를 치는 연습이 아닌 말을 하는 연습을 먼저 했다. 짧은 시간 감정의 흐름을 타야 하는 드라마 세트장에서 그는 처음으로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그의 입모양을 읽고, 자신의 ‘말’을 전했다. 전도연의 눈빛이 그랬다. “잘했어. 흐름을 놓치지 말고 대사가 아닌 대화를 주고받는 거야.” 호흡을 조절하고,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건, 그의 손에 늘 들려 있던 대본 대신 동료 연기자들과 수다를 떨고, 감독에게 자신의 연기 구상을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고, 그건 이제 막 좋은 연기가 가능해졌다는 얘기였다.

<남남북녀>의 철수와 조인성은 극과 극이다. 철수는 시간만 나면, 틈만 생기면, 돈만 받쳐주면 ‘걸’들과 놀아나기 바쁘지만, 조인성은 고작 게임기에 매달리는 게 전부다. 게임기에 싫증이 나면, 만화책 보고, 그러다 주어지지도 않은 휴가 날짜를 계산하며 여행하는 상상에 빠져들기도 한다. 2년 전에 구입한 자동차의 주행거리가 4000km도 안 된다고 하니, 스물셋 청년의 엉덩이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 98년 CF로 데뷔하고 나서 5년간 한번도 쉬질 않았으니, 모아둔 돈도 좀이 슬 지경이겠다. 그래도 <남남북녀>를 찍으며 실컷 노는 흉내라도 냈으니 조금 분이 풀리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뜻밖에 싱긋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요즘엔 모든 게 자신에겐 놀잇거리란다. 배우가 영화 안에서 노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인터뷰도 하나의 놀이라나. 어째 측은지심 가운데 기특함이 밀려든다.

<피아노>의 오종록 PD가 하루는 조인성에게 한 말이, “임마, 넌 연기는 못하는데, 네 것이 있어서 뭐라고 못하겠다”였다. 그러고보니 <학교>를 찍을 때도 종종 비슷한 말을 들은 적 있다. “어휴 저 녀석 고집은 있어서…”라고. 조인성과 작업한 감독들은 그에게 특별한 재능보다는 어떤 분위기, 혹은 고집이 있다고 말한다. 어느 프로필인가에 정우성이란 배우를 좋아하지만, 그 같이 되는 건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적힌 것도 얼핏 기억이 난다. 조인성은 스물아홉엔 자신만의 연기라는 성(城)이 이룩돼 있을 거라고 얘기한다.

<남남북녀>의 철수는 겉으론 노련한 작업의 대가인 척 굴지만, 속으로 무지 순진하고 어설픈 녀석이다. “오늘밤 널 불태우겠어” 따위의 말을 던져 여자를 낚는 녀석이나, 거기에 걸려든 여자나 모두 선수는 아니라는 소리렷다. 영화 어떻게 봤냐고 궁금해하기에, 놀아본 적 없는 사람이 선수 흉내를 내려는 게 조금 안쓰러웠다고 하자 손뼉을 짝 치며 반가워한다. “바로 그거예요. 선수인 척 굴지만 어설픈 모습, 그런 애가 바로 철수예요.” 자신의 연기가 먹힌 거라는 그의 주장에 그만 설득당하고 싶어진다. <마들렌> 얘기가 나오자,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진다. “지금까진 극중 희진처럼 전력 질주했다면, 앞으론 지석처럼 생의 디테일한 순간을 만끽하며 살고 싶어요.” 그와 함께한 오후 나절의 어느 자락은 분명 싱그러웠고, 어느 자락은 열정적이었으며, 어느 자락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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