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삶이 빚어내는 혼돈의 모자이크,<25시>
2003-08-19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 Story

마약 밀매상 몬티(에드워드 노튼)는 24시간 뒤에 법정에 출두해야 한다. 최소 7년형은 확실하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보석을 받아 잠시 자유의 몸이 됐지만 감옥행을 피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몬티는 남은 시간 동안 아버지를 만나 이별을 예비하고, 연인 내추렐(로자리오 도슨)과 친구들과 함께할 마지막 파티를 기다린다. 그런 몬티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곱상하게 생긴 백인남자가 감옥에 들어가서 겪을 ‘흉악한 고초’도 문제이지만, 믿어 의심치 않던 애인이 경찰에 밀고한 장본인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면도날 위에 선 듯한 시간을 보내는 몬티의 24시간이 숨막히게 전개된다.

■ Review

는 자유로운 상상을 촉발하는 두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유의 여신상 너머로 어둠에 잠긴 뉴욕이 하늘 높이 뿜어내는 두개의 파란 불빛. 이건 9·11의 ‘희생자’ 쌍둥이 빌딩을 가리키는 게 틀림없다. 몬티가 상처투성이로 내버려진 채 하릴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투견 한 마리를 발견하는 건 그 다음이다. 몬티는 처음에 그 개를 죽이려 했다. 고통을 줄여주려는 측은지심에서. 그런데 힘없이 숨을 몰아쉬던 그 개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발끈 성을 낸다. 그 순간 몬티는 ‘눈빛이 좋다’며 개를 살리기로 맘을 고쳐먹는다. 덕분에 개는 ‘도일’이란 새 이름으로 새 삶을 얻는다. 정작 몬티는 역전의 기회를 하사받은 도일의 운명을 닮지 못한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라며 뼈저리게 되뇌기는 하지만 파국으로 치달아온 길을 돌이킬 수는 없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내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스파이크 리는 불가능했으리라고 여기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부터 마약을 팔아 때깔 좋은 생활을 누리는 몬티, 투기에 다름없는 촌각의 승부를 벌이며 뭉칫돈을 굴리는 펀드매니저 프랭크(배리 페퍼), 소심증과 도덕 강박증에 사로잡힌 듯한 교사 제이콥(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세 친구는 미국의 이상한 얼굴이다. 스파이크 리는 그 얼굴에 반성어린 일기를 써넣는다. 그래서 뒤틀려버린 방향을 수정하지 못한 채 관성처럼 지속하는 개인의 삶이 자꾸 잃어버리게 되는 것들과 소중했던 자산인 쌍둥이 빌딩을 잃을 수밖에 없는 뉴욕의 그늘진 운명이 겹쳐진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내린 건 내부에서 시작된 통제할 수 없는 진동이 낳은 결과일지 모른다. 몬티처럼.

‘블랙 무비’의 대명사처럼 된 스파이크 리는 <말콤X> 같은 정치적 선동성과 <똑바로 살아라>처럼 삶이 빚어내는 혼돈의 모자이크 사이를 혼란스럽게 오고갔다. 는 후자쪽이다. 죽어가던 투견이 도일이란 이름을 얻은 것도 그렇다. 몬티의 사업 파트너이자 보디가드는 투견을 차에 실은 게 재수없다며 도일의 법칙 운운한다. 머피의 법칙을 그는 그렇게 착각했고, 몬티는 거기서 그 개의 이름을 찾았다. 그 머피의 법칙은 몬티에게 붙어버렸다. 그의 선택은 세 가지 중에서 가능할 뿐이다. 도주, 자살, 감옥. 또 다른 선택이 가능할 25시의 순간을 꿈꾸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몬티는 알 파치노의 ‘칼리토’처럼 누아르의 비극적 기운을 받은 캐릭터다. 특별히 악할 것도 없는 갱스터가 한번 보란 듯이 살고 싶었을 뿐인데 예정된 수순처럼 파멸을 향해 나아간다. 가 장르영화는 아니지만 이런 몬티에게서 장르적 재미를 기대할 수 있다.

인상적인 삶의 모자이크를 엮어내는 건 서로를 경멸하는 친구 프랭크와 제이콥이다. 이들의 대화는 생뚱맞지만 재치어린 독소가 매번 묻어난다. 프랭크는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자리 바로 옆의 고급 아파트에 산다. 공사 중인 테러 현장을 내려다보며 둘이 수다를 떤다. “여기 공기가 안 좋대. <뉴욕타임스>에 났어.” “웃기지 말라 그래, 난 <워싱턴포스트> 봐. 환경청에서 문제없댔어.” “한쪽은 거짓말이겠지.” “이사갈 거야?” “여기 돈을 얼마나 처들였는데!” “빈 라덴이 또 어디 떨어뜨릴지 알아?”

제이콥은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프랭크가 1주일 내내 다른 나라 정부를 등쳐먹을 궁리만 하다가 사무실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는 정신적 지체아인 것처럼 대하고, 프랭크는 고지식한 교사 제이콥이 돈 많은 부모를 수치로 여기며 굳은 얼굴로 돌아다니지만 실은 위선적인 자유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각광받은 는 몬티가 랩처럼 내뱉는 인종차별적 독백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다. 인도, 파키스탄, 러시아, 이탈리아, 유대인을 향해 개자식이라고 욕하는데 한국인도 예외가 아니다. “바가지장사 하는 한국놈들, 이민온 지 10년에 영어 한마디 못해.” 전체 맥락에서 보면 이건 성낼 일이 아니다.

영화는 두번의 절정을 붙여놓았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 오해하고 모욕하며 난장판이 돼버리는 클럽에서의 송별파티(스파이크 리의 연출 호흡이 가히 환상적이다)와 몬티의 아버지가 아들을 25시의 공간으로 이끌어가는 마지막 순간. 두 절정을 맞이하고 나면 아련하고 먹먹한 비애감이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다. 2001년 출간했던 데이비드 베니오프의 소설을 작가 자신이 각색했다.

:: <25시X>의 배우들

극중 캐릭터의 마음, 200% 관객에게 쏜다

에드워드 노튼은 특유의 연약한 표정 뒤에 사악한 기운을 언뜻 내비치면서(<프라이멀 피어>) 스타가 됐다. 이번에는 사악함 대신 흐릿한 번민을 깔아놓았다. 스파이크 리는 그를 굉장히 “똑똑한 친구”라고 추어올렸는데, 노튼은 에 대해 이에 걸맞은 철학적 해석을 가한다. “도덕적 복종의 결말에 관해서라기보다 윤리적 퇴색에 무작정 실려가느냐 아니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또 선택의 책임에 대한 고뇌로 떠나는 여행이기도 하다.” 노튼이 맡은 몬티와 가장 무관해 보이지만 심상치 않은 흡인력을 발휘하는 게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과 안나 파킨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로 등장하는 이들은 은근히 서로를 갈망하지만 필연적으로 비껴가버리는 사이다. 안나 파킨은 수업시간에 앤드루 파블의 ‘우아한’ 시를 낭독하고는 그 느낌을 묻는 질문에 “남자가 여자에게 자자는 거죠”라고 명쾌한 답을 내리는 매혹적인 10대 소녀다. <엑스맨>에서 돌연변이로서의 정체성에 고민하던 순수함 대신 단순히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매력을 보여준다. 교사 호프먼은 클럽에서 자석에 이끌리듯 안나에게 키스를 하기 전까지 위선적인 죄책감에 시달린다. 호프먼을 비꼬는 친구 프랭크 역의 배리 페퍼는 다소 느끼한 섹시남으로 등장한다. 알고보면 그도 쓸쓸한 내면을 지니고 있다. 마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판타지적 캐릭터로 등장하는 내추렐 역의 로사리오 도슨은 <He Got Game>에서 스파이크 리와 작업했던 흑인배우다. <맨 인 블랙2>에선 외계인을 목격한 지구인 의 기억을 지워야 하는 윌 스미스가 자신에 대한 기억까지 잊어버릴까봐 차마 기억을 지우지 못한 매력적인 여인으로 나왔다. 몬티의 아버지 브라이언 콕스는 신뢰감이 느껴지는 부성을 카리스마있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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